항목 ID | GC04203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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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主化運動 |
영어의미역 | Democratization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성환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저항적 사회 운동.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 운동]
8·15 이후 한국 사회는 분단과 단독 정부의 수립 이후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민주적 절차와 이념이 유린되어 왔다. 이 때문에 현대사를 통 털어 권위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부산에서는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 선도적이고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으로는 1960년 4·19 혁명,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민주 항쟁 등이 있다.
[4·19 혁명]
1960년 4·19 혁명 당시 부산에서는 3·15 선거를 전후하여 해동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동래고등학교, 항도고등학교 등의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확산되었고, 4월에 접어들어 대학생과 일반 시민이 참여하면서 시민 항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4월 19일 시내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계엄령과 군대의 출동으로 일시 억눌렸던 투쟁 열기는 4월 26일 부산 지역 대학 교수단의 데모와 대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불타올라, 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오기까지 부산에서만 19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다. 4·19 혁명에서 부산의 사망자는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부산 시민, 학생들은 차량을 징발하여 김해, 진영을 거쳐 마산까지 가서 마산 시민과 합세하여 원정 시위를 벌이고 자유당 당사 등을 파괴하였다.
[부마항쟁]
1979년 부마항쟁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서 발단하였다. 10월 16일 오전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는 오후부터 도심 시위로 발전하였고, 저녁 6시경부터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다양한 시민층이 참여한 시위대는유신 철폐,독재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경상남도청, 언론 기관 등을 공격하였다. 17일 저녁에도 시민, 학생들은 파출소, 경찰서, 중부산세무서, 동사무소, 언론 기관 등을 파괴하였다. 마침내 18일 자정을 기해 유신 정권은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그날 저녁에 부산시청 앞에서유신 철폐,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서도 18, 19일에 걸쳐 격렬한 항쟁이 벌어져 20일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부마항쟁은 김재규(金載圭)의 10·26 정변에 하나의 원인이 되어, 유신 독재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부마항쟁으로 마산에서 시민 1명이 사망하였고, 부산과 마산의 시민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5·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광주에서 5·18 항쟁이 일어났을 때 부산에서는 다수의 학생 운동 지도자와 재야인사들이 예비 검속된 가운데 일군의 운동가들이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19일 하오 7시경 부산대학교 학생 노재열, 김영 등은 시내 부산직할시 중구 광복동[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에서 계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 500여 장을 살포하였다.
5월 21일 경에는 영남상업고등학교[현 부산정보고등학교] 교사 신종권 등 동아대학교의 학생 운동 그룹이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5월 25일 경에는 김재규를 중심으로 한 10여 명의 활동가들이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알리고 시위를 선동하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였다. 이 투쟁들은 시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신군부의 거짓 선전을 폭로하고 5·18 민주화 운동의 대의를 지지함으로써 이후 반독재 투쟁의 전국적 연대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6월 민주 항쟁]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 부산은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29 선언까지 거의 연일 부산 전역이 가두시위의 현장이 되었다. 5월 27일 전국 최초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가운데 각계각층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6월 16일부터 22일까지 전개된 가톨릭 센터 농성은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 해산 이후 전국적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6월 18일을 전후하여 30만에 달하는 인파가 가두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소강상태에 있던 항쟁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6월 18일에는 시위 중 청년 이태춘(李泰春)이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고가 도로 위에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이처럼 부산 시민들은 대규모의 끈질긴 투쟁과 희생으로 6월 민주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다하였다.
[의의와 평가]
4월 항쟁에서 6월 민주 항쟁에 이르기까지 부산은 반독재 민주 항쟁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서 역사의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부산 시민들은 부산이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