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89
한자 四-一九革命
영어의미역 April 19th Revolution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강수영|박점도|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이종률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4월 19일연표보기 - 서면에서 대규모 시위
종결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 쿠데타 발발
발단 시기/일시 1960년 3월 12일~4월 18일연표보기 - 해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학생 시위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26일 - 대학 교수단 데모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26일 - 이승만 대통령 사퇴 성명
전개 시기/일시 1960년 5월연표보기 - 부산 지역 초·중등교원노동조합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0년 5월 25일 -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주비위원회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60년 6월 6일연표보기 - 경남노인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0년 6월 12일연표보기 -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0년 7월 29일 - 총선거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60년 9월 5일연표보기 - 동래유족회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1월연표보기 - 부산대학교, 수산대학 민족통일연맹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2월 7일 - 사회당 경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61년 2월 18일연표보기 - 한미경제협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13일연표보기 - 반민주악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15일연표보기 -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1년 3월 27일연표보기 - 경남학생총연합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1년 4월 18일연표보기 -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 창립
관련사항 시기/일시 1960년 7월 29일 - 한국교원노동조합연합회 결성
관련사항 시기/일시 1961년 2월 25일 -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창립
발생|시작 장소 서면 로터리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지도보기

[정의]

1960년 3월부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전까지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

[역사적 배경]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2월 28일 대구의 학생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 마산 시위를 거치면서 전국적인 민중 항쟁으로 확대되었고, 4월 19일 서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에 4월 26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하면서 12년에 걸친 제1공화국은 붕괴하였다. 이후 혁명의 열기는 사회 각 부문에서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고 민주적 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으로 전환되었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통일 운동으로 나아갔다.

[경과]

부산에서도 4·19 혁명은 고등학생의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3월 초부터 ‘공명선거’와 ‘학원의 자유’를 내세운 벽보와 유인물이 반(反)정부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12일 해동고등학교로 시작된 가두시위는 14일 데레사여자고등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항도고등학교·금성고등학교 등 대규모 연합 시위, 16일 영남상업고등학교와 건국상업고등학교 시위, 24일 부산고등학교 시위, 25일 동성고등학교 시위, 혜화여자고등학교경남공업고등학교의 야간 데모를 거쳐 4월 18일 동래고등학교 시위로 이어졌다.

간선 도로는 모두 학생들의 시위 현장이 되었고, 학생들은 여러 학교가 연대하여 연합 시위를 구사하였다. 4월 19일 드디어 학생 시위는 민중 항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날 서면 일대에서는 4·19 혁명 기간 최대 규모의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쏜 총기에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세하였고, 경찰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자 성난 군중은 경찰차와 소방차에 불을 지르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오전부터 시작된 시위는 밤늦도록 이어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빈민들의 합류가 눈에 띄었다. 버티지 못한 경찰이 부산진경찰서에서 퇴각하자 군중들이 경찰서를 파괴함으로써 서면 일대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에서는 경남공업고등학교 학생 강수영성남초등학교 학생 박점도를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19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고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4월 19일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5개 도시에 공포된 비상 계엄령[부산계엄사무소장 박정희 소장]으로 잠시 잦아들었던 시위는 26일 다시 점화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노인을 선두로 한 이색 데모로 시작되었는데, ‘선거 무효’, ‘이승만 퇴진’, ‘살인 경관 처단’을 내세운 노인들의 시위에 학생과 시민이 합세하면서 시위 행렬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 및 간호사, 동아대학교 교수와 학생으로 구성된 대학 교수단 시위가 더해지면서 10만 명을 넘긴 군중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윽고 이승만의 사퇴 성명이 전해지면서 권력에 대한 시위대의 불만이 폭발적으로 표출되었다. 시내 6개 경찰서는 예외 없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고, 파출소와 자유당 및 관련 기관, 서북청년단과 자유총연맹 등 반공 단체, 경남도지사 관사도 타격 대상이었으며, 부산시장의 집은 시위대에 의해 완전히 불타 버렸다. 이 외에 시위를 진압하던 소방서, 구청, 동사무소, 부패한 사학 재단의 이사장, 어용 노조의 간부 등 권력 기관 또는 권력의 비호 아래 전횡을 일삼던 인사들도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뒤 부산에서도 정치, 학생, 청년, 노인, 노동, 피학살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혁신 정계였는데,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의 움직임에 진보당 출신이 합류하여 형성되었다. 부산의 혁신 정당은 1960년 5월 25일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주비위원회[사회대중당 경남도당]가 출범한 뒤 7·29 총선거 이후 이합집산을 거쳐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통일사회당으로 정비되었다.

부산에서는 12월 7일 조직된 사회당 경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사회당 경남도당]와 사회대중당 경남도당의 활동이 적극적이었다. 진보적 청년층을 조직하는 움직임도 전개되어 6월 12일 자주적 통일을 위한 청년층의 결집을 내세우고 민주민족청년동맹이 창립되었으며, 통일민주청년동맹준비위원회[약칭 통일민주청년동맹]가 발족하였다.

민주민족청년동맹은 결성 직후 중앙맹부를 서울로 이전하고 이전의 중앙맹부는 경남맹부로 하였는데, 경남맹부는 통일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취하는 활동과 함께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결성되는 데 중요한 축을 형성하였다. 노인계의 조직화도 진행되어 1960년 6월 6일 경남노인회가 결성되었다. 경남노인회는 친일 경력이 없고 통일을 지향하는 인물이면 가입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한때 참여자가 1,200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이들을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노인층은 특성상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다른 집단에 비해 월등하였으므로, 경남노인회는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4·19 혁명을 선도한 학생층은 학도호국단의 해체, 어용 교사와 교수의 축출을 주장하며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학생은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를 중심으로 통일 운동에 참여하여, 11월 부산대학교와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에서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1년 3월 27일 부산·경남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대표로 경남학생총연합이 결성되었다.

4·19 혁명은 노동 운동에도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 노동계의 관심은 교원 노동조합의 설립과 어용화된 부산부두노동조합의 민주화였다. 교원 노동조합은 교육 현장의 비(非)자주적이고 반(反)민주적인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구·경북과 더불어 부산·경남이 그 진원지였다. 부산에서는 1960년 5월 15일 중등학교, 21일 초등학교 교사들이 교원 노동조합을 설립함으로써 7월 29일 한국교원노동조합연합회[약칭 한교조]를 결성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뒤 8월 2일 경남교원노조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교원 노동조합은 교원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장면(張勉) 정권에 교원 노동조합 합법화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 투쟁에는 혁신 정당과 민주민족청년동맹 및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 구성원의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랐다. 부산부두노동조합은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대의 거점 사업장이었지만, 부산부두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1958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위원장이 된 김기옥의 사조직으로 전락하여 비리와 폭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4·19 혁명에서 김기옥의 집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고, 부산부두노조의 민주화는 김기옥 일파를 부산부두노조에서 퇴진시키는 반(反)김기옥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6·25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도 전개되었는데, 9월 5일 동래유족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전개한 결과 동래, 기장, 해운대 등지에서 713구의 암매장된 유골을 발굴하였다. 동래유족회연제구 화지산의 능선에 합동 분묘를 만들고 위령비를 건립하였으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분야의 민주 세력은 함께 연대하여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1년 2월 18일 사회당 경남도당과 민주민족청년동맹 및 통일민주청년동맹은 한미경제협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불평등한 경제 협정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3월에 접어들어 2대 악법 반대 투쟁이 전개되자, 3월 13일 혁신 정당과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은 반민주악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5일 대학생과 고등학생은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함께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여기에는 지역 노동계도 적극성을 보였다. 연대 활동이 가장 광범위한 부문은 통일 운동이었다.

1960년 후반 통일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면서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결성되는 과정에 부산에서도 사회당, 사회대중당, 경남노인회,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4월 18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월세계 예식장에서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는 부산 지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도 적극적인 지지 활동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결과]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7·29 총선을 통해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장면 정권 아래서 사회 각 방면에서 민주화 운동이 고조되고 통일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이후 혁신 정당,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경남노인회, 경남교원노조연합회,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 등은 해체되었다. 부산부두노조의 민주화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동래유족회가 조성한 합동 분묘와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설치된 혁명 재판에서 경상남도 사회당 사건으로 김용겸, 경상남도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윤우현, 경상남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임갑수, 경상남도 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으로 권종현, 부산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으로 김상찬, 경상남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사건으로 정순종유혁,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사건으로 이종석, 동래피학살자합동장의위원회 사건으로 송철순, 경상남도 반민주악법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 사건으로 손병선과 나택균 및 최석환, 『국제 신보』 주필 및 상임 논설위원 사건으로 이병주변노섭,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과 『민족 일보』 사건으로 이종률(李種律) 등이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 정순종은 옥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4·19 혁명은 비자주적이고 반민주적인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민주화 운동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귀결점은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었다. 부산에서는 이러한 4·19 혁명의 단계적 특징과 총체적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학생들의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서 시작하여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 항쟁으로 확대되는 초기 단계,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을 거쳐 한반도의 분단을 평화적이고 자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통일 운동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4·19 혁명의 과정에서 부산의 민주 세력이 기여한 가장 큰 의의는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의 창립을 견인하고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통일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등 4·19 혁명의 최고 정점인 통일 운동을 전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데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