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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24
한자 李甲成
영어공식명칭 Lee Gabsung
이칭/별칭 연당(硏堂)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 10월 23일연표보기 - 이갑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이갑성 3·1운동을 주도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0월 30일 - 이갑성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 확정
활동 시기/일시 1922년 5월 5일 - 이갑성 만기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이갑성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3월 - 이갑성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이갑성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중앙집행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2월 - 이갑성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당선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이갑성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활동 시기/일시 1965년 2월 - 이갑성 광복회 초대 회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81년 3월 25일연표보기 - 이갑성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족대표 33인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갑성(李甲成)[1886~1981]은 1886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연합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가계]

이갑성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연당(硏堂)이다. 아버지는 이기덕(李基德)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이갑성은 어려서 한학을 익히고 1906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대구에서 1년간 대남소학교 교사로 종사하다가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하였고, 1915년 세브란스연합병원 제약 담당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이갑성은 1919년 2월 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연희전문학교 김원벽(金元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金炯璣), 경성전수학교 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배동석(裵東奭) 등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이후 이갑성은 기독교 측 대표 중 한 사람이 되어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갑성은 경상도의 연락 책임을 맡고 1919년 2월 24일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集)을 만나 서울에서의 3·1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요청하였다. 이갑성은 2월 28일 세브란스전문학교 학생 이용설(李容卨)에게 「독립선언서」 5매를 세브란스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전달케 하고, 3월 1일 이만집에게 「독립선언서」 수백 매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후 이만집은 남성정교회 장로 김태련(金台鍊)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를 만나 대구의 3·1운동을 준비해 나갔고,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추동하였다.

이갑성은 이용설과 박연세에게 마산·군산 등지에 각각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게 하였고, 세브란스전문학교 교수인 스코필드(F. W. Schofield)[한국명 석호필(石虎弼)]에게 해외 선전을 요청하였다. 이갑성은 3월 1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1919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2년 5월 5일 만기 출소하였다.

이갑성은 1922년 9월 3일 대구의 신정교회(新町敎會)와 남성정교회에서 전도 강연회를 진행하였고, 11월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에 준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 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민립대학 지방준비회에 편성되어 군산·익산·전주·나주 등지의 지방부 설립 활동을 벌였다. 또한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고 24인의 이사에 선정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순종(純宗) 인산 때 상민봉도단(商民奉悼團)과 소년척후총연맹 등의 활동을 벌였고, 1927년 1월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이갑성은 1938년 5월 26일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의 지휘로 체포된 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갑성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12월 14일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갑성은 1947년 2월 서울에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48년 3월 5·10선거 관리를 위한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갑성은 1950년 5·30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대구 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1년 5월 부산에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김성수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이갑성은 5·16군사쿠데타 이후인 1961년 11월 공화당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65년 2월 광복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갑성은 1981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갑성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1-2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갑성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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