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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39
한자 朝鮮民立大學期成會 大邱地方部
이칭/별칭 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2월연표보기 -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 조직
성격 교육운동단체
관련 인물/단체 홍주일|이종희|김구|장홍식|양대경|김의균|남필우|서상일

[정의]

1923년 2월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소속 조직.

[개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이 문화통치로 바뀌었다. 그러나 문화통치라는 것은 일제가 자신들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위장 수단일 뿐, 실질적으로는 탄압과 감시, 민족문화 말살, 경제적 수탈 강화를 위한 고도화된 식민 통치 방식이었다.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일제는 교육차별을 없앨 것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실업교육만을 강화,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일제의 정책에 맞서 이상재, 한용훈, 이승훈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고등교육을 통한 조선 청년의 실력양성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맞선 민족 교육 운동이었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는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총회를 가졌고, 전국적으로도 속속 지방부가 설립되었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는 1923년 2월 설립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대구 지역 지방부로 대구 지역 교육운동을 위한 단체였다.

[역사적 배경]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높아진 교육열과 교육수준의 향상이 반영된 것이었으며, 일제의 우민화 교육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대학 설립에 대한 열망을 무마하고자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 개정된 조선교육령은 조선에서도 대학 설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내용을 실펴보면 “모든 교육정책의 입안과 운영, 전문학교·대학·예과 설립 자격은 총독부에서 관장한다”는 것으로 총독부에 대한 설립 및 운영 군한을 몰아 주는 것이었다.

중앙에서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922년 12월이었다. 대구에서는 1922년 11월 사립학교 대표 10명으로 ‘사립학교 간 연락, 교육자 친목, 학술 연구 및 교육 보급의 노력’을 지향하는 대구교육자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경과]

대구에서는 1923년 2월에 초에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발기인이 구성되었다. 발기인은 홍주일, 이종희, 김구, 장홍식, 양대경, 김의균, 남필우, 서상일 등이었다.

1923년 6월 26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집행위원장에 김의균이 선임되었고, 집행위원, 회금보관위원, 감사위원 등 65명의 임원을 구성하였다. 물산장려운동과 달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는 변호사, 의사, 유도진흥회, 언론인, 대구청년회, 여성, 대구노동공제회, 교육계, 자본가 등 다양한 인사와 대구 지역의 대표적 사회단체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결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는 중앙의 조선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대구지방부도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하면서 사라져 갔다.

[의의와 평가]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는 대학 교육을 전망하며 조선인의 역량으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지역 차원의 운동이었고,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지역의 열망이 실천 운동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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