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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48
한자 二代惡法反對 大邱蹶起大會 -
이칭/별칭 대구데모사건,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경북교원노동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1년 4월 2일연표보기 -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 시작
성격 사건|사회운동

[정의]

1961년 4월 2일 대구에서 개최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 반대 집회 및 시위.

[개설]

1961년 장면 정부의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 시도에 대응하여 대구의 정당·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들이 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이대악법반대 경북공투위]를 결성하고, 악법 제정 반대를 위하여 4월 2일 저녁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를 개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61년 3월 8일과 9일 장면 정부는 각 신문을 통하여 “정부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각의에 상정하기 위해 심의 중에 있고, 내무·법무 양 장관이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별도로 구상 중에 있다”라는 발표를 하였다. 두 법안 모두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비민주적 조항을 담고 있었으며 통일운동과 정치운동을 규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두 법안은 4·19혁명에서 나타난 대중의 민주·자주·평화에 대한 열망과 집회·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반민주적 악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2대 법안 제정 관련 보도가 전하여지자마자 대구의 언론계는 사설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압살을 좌시할 수 없다」[『영남일보』, 1961년 3월 12일], 「양 법안은 헌법 위반이다」[『대구일보』, 1961년 3월 12일], 「민주당은 야당 시절의 고통을 벌써 잊었는가 반공특별법이란 환상을 청산하라」[『매일신문』, 1961년 3월 12일]라며 비판하였다. 이후 대구 지역의 각 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 및 학생들은 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 이대악법반대 경북노동단체공동투쟁위원회, 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꾸려 이대악법반대운동을 펼쳤다.

[경과]

이대악법반대 경북공투위는 1961년 4월 2일 저녁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정부 당국은 대구역 광장에 대한 장소 사용 불허 방침을 세우고, 대회를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대구역 광장 및 시내 주요 거리에 수천 명의 경찰을 배치하였다. 대구에서는 4·19혁명 이후 최대의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이대악법반대 경북공투위는 장소 불허와 집회 불허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회를 강행하였다.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장 정권 물러가라”, “악질경찰관 물러가라”, “이대악법은 살인법이다. 죽음으로써 막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그 외에도 “반공이란 구실보다 배고프다 통일하여 살아 보자”, “노동자 농민이여 일어서라. 학생들이여! 시민들이여!”라는 외침과 “국회는 해산하라”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와 횃불데모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동원된 2,000여 명의 경찰 병력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는 대구에서 이대악법반대운동을 파급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과]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에 대해 장면 정권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주최 측 35명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대구의 경북교원노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는 구속자에 대한 전원 석방을 요구하였고, 구속자들은 단식투쟁을 벌이며 저항하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법정에서 ‘대구데모사건’으로 명명되어, 관련자들이 사법 처리되는 탄압을 받았다. 혁명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교원노조경북연합회위원장 김문심,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경북연맹 위원장 최일·조직부장 이승춘, 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위원장 정만진, 통일사회당 조직위원 이동재·이홍주, 민족민주청년동맹 경북도맹 통제위원장 박상홍·맹원 하정기, 혁신당사회대중통합위원회 집행위원 겸 간사장 박지수, 대구시노동연맹 쟁의부장 권오봉, 민족통일연맹원 홍영훈,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학생 이정희, 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학생 성낙호, 가정주부 신용선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는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 반대 여론을 고조시키고 대구와 전국의 이대악법반대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4·19혁명을 통하여 확인된 민주주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유지·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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