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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47
한자 二代惡法反對 慶北學生共同鬪爭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1년 3월연표보기 - 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61년 5월연표보기 - 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해산
성격 사회운동|학생단체

[정의]

1961년 3월 대구 지역 학생들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하여 결성한 단체.

[개설]

대구 지역 학생들은 1961년 3월 장면 정권이 통일운동과 정치운동 등을 억압할 목적으로 법제화를 시도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반대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이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이하 ‘경북학생공투위’]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구역 광장과 수성천 변 등에서 수차례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경북학생공투위는 장면 정권의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무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북학생공투위는 1961년 3월 18일 비가 내리는 상황에도 학생 및 일반 시민 4,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투쟁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에서는 “① 장 정권은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이대악법을 철폐하라, ② 장 정권은 무산대중을 살릴 수 없는 정부이므로 즉시 물러가라, ③ 민주 수호의 이름 아래 백색 테러를 음모하는 반공 브로커 단체는 해산하라”는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회를 마친 학생들과 시민들은 횃불 시위를 벌이며 “데모로 세운 나라 데모를 막으려나”, “피로써 빼앗은 권리 총칼로 못 막는다”, “장 정권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 대열은 조재천 법무부장관 집 앞에 이르러 “조 장관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대악법반대투쟁대회는 대구에서 이대악법반대운동이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던 야당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경북학생공투위는 3월 24일에도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2만여 명이 모인 대구역 광장에서 장면과 조재천을 뜻하는 ‘장 씨 입관’, ‘조 씨 입관’이라고 적힌 나무 관 두 개를 메고 길거리에 운반하였고, 대회 연단에는 검은 글씨로 ‘신랑 이승만’, ‘신부 장면’이라고 쓴 볏짚 허수아비 두 개를 올려놓고 주례 이완용의 주례사가 있는 가장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저녁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대구역 광장에서 중앙로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횃불 데모를 벌였다.

경북학생공투위는 1961년 3월 31일부터 4일 1일에 걸쳐 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 이대악법반대 경북노동단체공동투쟁위원회 등과 협의 후 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이대악법반대 경북공투위’]를 결성하고, 4월 2일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 경북공투위 명의로 이대악법반대 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를 개최하였다.

장면 정권은 불법 시위 및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경북학생공투위 간부 13명을 지명수배하여 검거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이대법안반대운동은 구속 학생 석방 시위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영남고등학교·협성상업고등학교[현 협성고등학교경북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합류하였다. 언론에서도 구속된 시위 참가자들을 즉시 석방해야 한다는 동조 여론을 조성하였고,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교수들도 담당 검사를 방문하여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경북학생공투위는 1961년 4월 14일 대구의 수성천 변에서 이대악법반대 규탄대회를 열고 “① 장 정권은 학원의 자유를 파괴하는 만행을 중지하고 구속된 데모대원을 석방하라, ② 이대악법을 철회하고 국회는 그 심의를 거부하라, ③ 4·19 기념행사를 음모하기 위한 어용 4월혁명학생동지회는 해산하라, ④ 군인과 경찰은 민족과 부모형제의 장래를 위해 민중의 편에 서라”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또한 “백만학도 잡아 보라”, “어용 판사 물러가라”, “4·2 민주투사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북학생공투위이대악법반대운동을 계속 이어 갔지만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쿠데타 이후 여러 정당·사회단체와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북학생공투위는 대구 지역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주도하며 4·19혁명의 민주적 성격을 재확인시켰으며, 전국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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