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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민주구국선언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50
한자 反獨裁 民主救國宣言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73년 11월 5일연표보기 - 반독재 민주구국선언사건 발생
해체 시기/일시 1973년 11월 5일연표보기 - 반독재 민주구국선언사건 종료
최초 설립지 경북대학교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지도보기
성격 학생운동
설립자 여정남|임구호|정화영|이강철|임규영|황철식|강기룡|이광하|최재룡|최문수|강동균|장성백|박명규 등 주도

[정의]

대구의 경북대학교에서 1973년 11월 5일 전개된 반유신 시위.

[개설]

1973년 11월 5일 경북대학교에서 전개된 반유신 시위는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시위 이후 지역 대학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유신 반대 시위이었다.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는 이념서클 한국풍속연구회가 중심이 되고, 한국풍속연구회 전신 서클인 정진회 회원 정화영 등이 준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반유신 항쟁의 첫 봉화를 올린 후, 경북대학교의 정화영과 임규영은 반유신 항쟁을 결의하였다. 임규영은 한국풍속연구회 회원을 선별하여 투쟁 조직에 참여시키는 역할을 맡고, 총책임을 맡은 정화영은 나머지 모든 일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1973년 10월 30일 1차 반유신 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준비 부족과 사복경찰의 신속한 투입으로 시위는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여정남, 정화영, 임규영은 다시 만나 학원 내에 사복경찰 병력이 상주하고 대중이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초기에 진압을 압도하는 역량을 투입하여 기습적이고 전격적인 투쟁을 감행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1975년 11월 5일 월요일 오전 10시 1교시 수업 직후로 행동 개시일이 정하여졌다. 월요일 오전 10시는 정보기관들이 방심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여정남과 정화영 등은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반독재 민주구국선언문’과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개시하였다. 얼마 뒤 일청담 부근에 200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현장을 주도하였던 정화영은 대학 언론의 소명을 잊은 채 유신체제를 긍정적으로 다루어 학생들로부터 비판받았던 경북대학교 학보사 신문 보급소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당시 주요 일간지들은 유신체제에 대하여 정부 입장만 기사화하고, 학생과 종교계 등의 반유신 투쟁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경북대신문』도 이에 동조하여 유신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을 실어 경북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로부터 정권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선 학생들은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200명~300명이 스크럼을 짠 채 학교 후문을 나가 경상북도청까지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선언문과 구호 등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민주화, 빈부격차 해소, 종속경제 반대와 민족 자립 등도 요구하였다. 특히 시위 현장에 등장한 “반민주적인 유신헌법 폐지하고 민주헌법 제정하라”는 구호는 반유신 시위에서 최초로 제기된 의제였다.

[현황]

반독재 민주구국선언사건(反獨裁民主救國宣言事件)으로 박정희 정권은 경북대학교 반유신 시위를 저지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대구 북부경찰서 정보과장을 직위 해제시키고 30여 명의 전담 수사 요원을 배치하여 수사본부를 차리게 하였다. 1973년 11월 5일 반유신 시위로 입건된 경북대학교 학생 10명은 11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이강철·신유균·최문식 등 3명은 구속 송치되고, 강동균·허식[여학생·시위 당일 유인물 살포] 등은 불구속송치되었다. 정화영 등 5명은 수배 중 기소중지자로 송치되었다

12월 초순경 유신정권은 계속 확산하는 전국적 학생 시위를 휴교령과 종강으로 잠재우면서 한발 물러나 1973년 10월 2일 이후 시위와 관련되어 구속·수배된 모든 학생들에게 사면 조치를 단행하였다. 구속되었던 서울대학교와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석방되고 수배 학생들의 수배도 해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반독재 민주구국선언사건은 1972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의 반유신 시위 이후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이 저조한 가운데 지역에서 처음으로 반유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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