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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정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75
한자 南山町委員會
이칭/별칭 남산정진흥회,남산진흥회,대구부남산정진흥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7월 3일연표보기 - 남산정위원회 결성
최초 설립지 남산정위원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대성학관]지도보기
성격 사회단체

[정의]

1923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결성된 사회단체.

[개설]

남산정(南山町)[현 중구 남산동]은 덕산정(德山町)[현 중구 덕산동], 봉산정(鳳山町)[현 중구 봉산동], 신정(新町)[현 중구 대신동], 달성정(達城町)[현 중구 달성동], 시장정(市場町)[현 중구 동산동] 등과 함께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인 거주지였다. 남산정은 1922년 1,300여 호에 약 4만여 명이 살았던 대구 최대 시가인 동시에 최대 조선인 거주지였다.

서문시장서문시장 인근 주택지구인 남산정은 “비나 눈이 오는 때이면 진흙이 튀어 오르고 하수구 하나 없으며, 길가의 도랑이란 것은 비가 조금만 와도 길에 넘칠 뿐 아니라 항상 악취가 나 지나다니는 사람의 코를 찌르며 우편함 하나 없다. 편지를 부치려면 내왕 30분, 40분 걸려야 되고 또 가로등은 볼 수가 없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기반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남산정은 명치정(明治町)[현 중구 계산동2가]과 함께 조선인 부호들 집이 집중된 곳이었다. 당시 “남산정이나 명치정 부근 일대에는 가가호호에 걸인 엄금(嚴禁)이라는 문자를 딱딱 부치엿다. 무가무의한 가련의 걸인 동포를 구제치는 못하게 야박한 문자를 문두에 부치는 것은 참 대구의 특색이다”라고 할 정도로 남산정은 신분·직업·경제력에 따라 생활 여건이 큰 격차를 보이는 곳이었다.

[설립 목적]

남산정위원회(南山町委員會)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 남산정의 발전을 꾀한다는 명목하에 결성되었다.

[변천]

남산정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남산정진흥회이다. 남산정위원회는 1922년 9월경 총대(總代) 1명, 부총대 1명, 서기 1명, 위원 24명으로 구성된 남산동정민회를 기반으로 하여 1923년 7월 3일 대성학관에서 결성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구부 시가지 정리 사업이 진행되었다. 1922년 대구도시계획위원회가 구성되고 1923년 대구부도시계획 조사 규정이 결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대구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도시계획은 1920년대 전반 대구 지역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때 남산정위원회는 1924년 조선인 부협의원과 연대하여 대구 시가 정리비 예산 70만 원을 남산정 도로 개선 비용으로 배정받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24년 6월에는 활동사진[영화]을 상영하여 대구 부민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남산정위원회 위원은 서상열(徐相烈), 한규식(韓圭植), 김구(金坵), 백남부(白南富), 최성우(崔晟羽), 김홍성(金鴻聲), 박만철(朴晩喆), 윤학기(尹學基), 박응달(朴應達), 최해종(崔海鍾) 등 약 15명이었다. 이 중 한규식과 김구 등은 교육 운동과 청년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명망가였고, 그 외 인물도 남산동의 유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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