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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27
한자 嶺南學派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정의]

대구 지역에서 16세기 이래 영남을 이끌어 간 재지사족 세력.

[개설]

조선 초기 경상도에서는 학문적 계보가 김안국을 매개로 손소·손중돈 계열에서 이언적이, 권벌·이우·이현보의 기반 위에서 이황이, 정여창·김굉필·김일손의 학문 전통 위에서 조식이 나온 것으로 인식하였다. 영남학파는 사림파로부터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기초가 되는 『소학(小學)』 교육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른 성리학적 의례와 실천윤리를 이어받았다. 영남학파는 사림 정치의 정착을 위하여 포석을 놓고 그 위에 한국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함과 동시에 난숙한 유교 문화를 꽃피우는 데 주도적인 기능을 하였다.

[내용]

영남 지방은 16세기 이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재지사족을 보유하였으며, 속현과 향·소·부곡 등 임내(任內)도 가장 많이 존재하였다. 재지사족들은 미개발 상태였던 임내 지역을 개발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고 동성촌을 형성하였다. 재지사족인 광산김씨 예안파가 이렇다 할 관직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안동권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인정받은 것은 재지사족과 중첩적인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북송의 도학이 주희[주자]에 이르러 종합·정리되었듯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퇴계]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조선 초기 성리학의 계보는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학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호학파에서도 이황의 권위를 인정하여 조광조, 이황, 이이·성혼으로 계보화하였으나, 이황과 이이의 학설은 전혀 다르다.

퇴계학은 붕당을 초월하여 관학의 위치에 있었다. 근기남인[경남(京南)]은 이황뿐만 아니라 서경덕·조식 같은 학자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말 채제공은 노론 주도 정권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으로 이황, 정구, 허목,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정립하고, 경상도의 남인[영남]과 제휴하였다. 조선 후기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영남학파는 ‘영남만인소’처럼 향촌 사회의 공론을 대변하는 유소를 통하여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영남학파는 16세기 중후반에는 역사적 과제를 잘 수행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는 보수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모화사상에 매몰되어 중국 것의 모방과 반추에 급급한 한계가 있었다.

영남학파는 공고한 경제적 기반 위에 지역사회에서는 향청·서원·문중을 중심으로 강인한 동류 인식을 가졌다. 재지사족들은 부·모·처로부터 전래한 상속과 분배, 복거(卜居)와 개간, 매입을 통하여 재산을 증식하였다. 초기에는 노비에 더 비중을 두었으나 후기에 토지를 더 중시하고 매매는 내외 친척 간에 주로 하여 재산이 가문 밖으로 누출되는 것을 막았다. 재지사족들의 일기에는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이자 놀이[장리]나 상행위 등을 통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한 사례가 많이 나온다. 이황이 평생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 다진 일정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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