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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학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41
한자 寒岡學派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정구의 학맥을 계승한 지식인 집단.

[개설]

낙동강 중류 지역은 지금까지 퇴계학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상류 지역과, 남명학의 온상이었던 낙동강 하류 지역의 ‘경계’나 ‘사이’에 있다. 낙동강 중류 지역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의 영향 속에서 이 둘을 융합 및 회통하려는 한편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는 데에도 보다 유연하였다.

[내용]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는 16~17세기 바로 이러한 지리적·학문적 배경 속에서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를 회통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을 형성하였다. 정구는 30대에 창평산의 한강정사에서부터 40~50대에 회연초당, 60대에는 수도산의 무흘정사 등 주로 성주 지역의 여러 곳에서 많은 문인을 양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열었다. 한강학파는 차츰 낙동강 중류 지역 전체로 확산하였다. 성주의 회연서원, 칠곡의 사양서원, 대구의 연경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함안의 도림서원 등 정구를 제향하는 서원들은 한강학파의 거점이었다.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 수록된 342명의 정구 문인은 경상도와 서울 등 전국적으로 분포하였지만 90%가 영남 출신이었으며, 약 60%는 낙동강 중류 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들은 혼맥에 바탕한 혈연적 유대와 문인 상호 간의 친인척 관계 등을 학연으로 이어 갔다.

정구 문인 중에 확인된 인물로는 대구가 성주[67명] 다음으로 많은 30명에 이른다. 대구가 성주와 가까운 거리이면서 퇴계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은 이황의 제자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을 통하여 퇴계학을 계승하였다.

한강학파의 대구지역 양대 산맥인 손처눌은 1571년, 서사원은 1577년 정구와 학문적 인연을 맺었다. 이후 정구가 1612년 노곡정사(蘆谷精舍)[칠곡군 왜관읍 낙성1리]로 이거하여 본격적으로 강학 활동을 시작하면서 손처눌서사원의 문인들까지도 한강학파로 흡수되었다. 이때부터 한강학파는 대구의 지배적 위치에 오르게 되었고, 대구가 한강학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 후기 대구 사족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읍지(邑誌)에 입록하기 위하여 선조가 정구의 문인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의 인물편을 분석하여 보면, 정구의 문인 22명은 1637년 서사원·손처눌·채몽연·서시립 4명이 처음 수록된 이래, 1697년(숙종 23) 우석규(禹錫珪)『대구부읍지』를 수정하면서 박수춘·류시번·채무·최동집·곽재겸·손린·이주·도성유·도여유·서사선·손처약·정추·박종우·도경유·정광천 15명을 추가하였고, 1832년에는 최동률·채선길·최동직 3명을 추가하였다.

한강학파는 퇴계학과 남명학을 융합·회통하고,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학문적 경향과 실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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