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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4·19운동은 한국 현대 민주·민족운동의 분수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23
한자 大邱- 四一九運動- 韓國 現代 民主民族運動- 分水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전개된 민주·민족운동.

[개설]

대구광역시의 4·19혁명2·28민주운동에서 시작되어 3·15부정선거 시위를 거쳐 4·19로 이어지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민족운동이 싹트게 하였다. 4·19혁명 시기 대구광역시에서 다양한 민주·민족운동이 봇물 터지듯 표출되어 한국의 민주·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4·19혁명은 한국 현대사회에서 민주·민족운동의 시발점이었다. 4·19혁명은 지배계급의 교체 없이 정권의 교체만 이루어졌다는 점과 독재 세력을 일소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혁명’이라 부른다.

[학원민주화운동]

4·19혁명 시기 대구광역시에서는 자치 학생회 건립어용 교사 축출 및 부패 재단 정화, 그리고 교원노조 동조 및 지지 활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학원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첫째, 자치 학생회 건립은 학원의 자주성 확보를 내세우고 1960년 4월 26일 시위 이후 본격화되었다. 관제 학생회인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율 학생회의 건립을 목표로 하였다. 학생들의 노력과 정부의 법률 폐지 이후 일선 학교에서도 자치 학생회가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후속 조치를 자발적으로 실시하였다. 곧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 학생주임들이 ‘대구시학생생활지도위원회’를 결성하여, 과거 보도위원회의 하향식 지도를 지양하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생회를 구성·운영할 수 있도록 원조하고자 하였다. 이후 대구 시내 각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치 학생회를 구성하여 학원의 자율성과 민주성을 확보하여 나가는 가운데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둘째, 어용 교사 축출부패 재단 정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어용 교사 축출은 학원이 정권에 예속된 상황에서 교육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반공 이념을 강화하고 이승만 및 자유당 정권을 찬양하며, 왜곡된 사회 현실을 구조화하는 데에 일조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 대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전개되었다. 부패 재단 정화 운동은 사립학교 교육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 운동이었고, 사립대학과 사립 중등학교에서 전개되었다.

셋째, 교원노조 동조 및 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구광역시에서 시작된 교원노조운동이 교원노조 합법화를 위한 투쟁을 벌일 때, 학생들도 지지를 보내며 동조 시위를 펼쳤다. 학생들은 “스승 없는 학도는 있을 수 없다.”거나 “쓰러진 우리 스승 투쟁으로 구출하자.” 또는 “민주 학원 이룩하자.”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교내외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동조 농성을 벌였다.

[신생활운동]

4·19혁명 시기 대구의 학생들도 서울의 대학가에서 일어난 신생활운동에 영향을 받아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생활계몽대 또는 신생활계몽대를 결성하여 “양담배 배격”, “정치혁명과 함께 생활 개선”, “국산품 애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선전 활동을 벌였다. 또한 당시 크게 유행하던 바, 카바레, 다방의 문을 닫게 하자거나 일본 가요를 일소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등 향락 문화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이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인한 농민의 극심한 피해 양상을 지적하고, 미국 상품의 사용 억제를 주장하며, 휘발유 절약 등의 경제활동 방침을 정하여 계몽 활동을 펼쳤다. 실제로 신생활계몽대의 학생들이 거리에서 일본 음반을 수거하여 불태우는가 하면 무허가 카바레를 급습하여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런 학생들의 활동은 기성세대의 일상생활에 일대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대구 지역 신생활운동은 지역 언론뿐 아니라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지역 언론사들은 사설을 통하여 생활 계몽을 위한 학생들의 활동에 기대감을 표시하며 지지를 보냈다. 전국적으로는 학생들의 신생활운동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논쟁이 일어날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대구 지역 학생층은 일상생활의 개선이라는 미세한 부분까지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반민주 및 부패 세력 척결 운동]

대구에서는 1960년 7·29총선거를 계기로 민주주의 사회 실현을 위한 반민주·부패 세력 척결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 6월 20일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민주선거촉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정치적 중립을 확인하면서 공명선거 활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공명선거 운동이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고조되면서 ‘전국대학생민주수호추진위원회’가 결성될 수 있었다.

대구에서는 7·29총선거가 다가오자 학생 중심의 반혁명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1960년 7월 16일에 대구역 광장에서 대구 지역 12개 단과대학과 26개 고등학교 등 1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반혁명인사 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학생들은 규탄 대회에서 총선거에 과거 자유당 관련자들이 입후보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동시에 후보 사퇴를 촉구하였다. 1960년 7월 27일 수성천 변에서 서울대학교 국민계몽대·경북대학교·대구대학교·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등 4개 대학이 주최한 ‘반혁명세력규탄학생궐기대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부패 기성세력은 물러가라’, ‘부정 축재자 및 그 은폐자의 엄단’, ‘일체의 금권선거 배격’, ‘거창·가창·산청 등지의 수많은 양민 학살 원흉과 백범 김구 선생을 위시한 민족지도자의 암살 배후 규명과 엄단’, ‘4·19 순국 학도의 피를 모독하는 정치인 및 그 앞잡이와 혁명 정신을 팔아먹는 자를 철저히 배격’, ‘우리는 일당독재를 막아야 한다’ 등의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반민주 인사 규탄 운동에 힘입어 구 자유당 출신 입후보자는 모두 낙선하였다. 나아가 1961년 1월 12일에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조직법」의 공포에 기여하였다.

[교원노조운동]

교원노조운동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9일 대구종로국민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에서 정당 및 관권을 배격하고 교육의 자주성을 견지하기 위한 교원노동조합대구시위원회 결성에서 비롯하였다. 이어 1960년 5월 30일 경북교원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대구에서 최초로 시작된 교원노조는 단순한 교원의 생활 개선 운동, 즉 경제적 차원을 넘어 교조 합법화 투쟁, 노동조합법 개악 반대 투쟁, 학원 정화 투쟁을 통하여 ‘교권 확립’,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정치·사회단체와 함께 이대악법연합공투위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교원노조운동의 핵심은 교원노조 합법화 투쟁이었다. 교원의 지위 향상, 교원의 사회보장제도 확립, 교원의 신분 보장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교육자는 일반 노동자와 구별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원노동조합의 합법화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교원노동조합은 집회, 시위, 단식 등의 방식을 통하여 합법화 투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대구 각급학교의 학생들도 교원들의 교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을 지지하여, 동조 동성을 벌이고 지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지구 및 경북지구 교원노동조합은 전국교원노동조합대표자대회를 유치하는 활동을 벌였다. 대구지구 및 경북지구 교원노동조합은 1960년 7월 3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교원노동조합 전국대회의 준비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전국교원노동조합 전국대회에서는 ‘교원노조 해제 결사반대’가 중심 내용을 이루었다. 1961년 4월 9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교원노동조합대표자대회에서는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즉시 철회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어 참가 교원들은 ‘이대악법반대’ 현수막을 앞세우고 대회 장소인 대구여자중학교[현 대구일중학교]를 나서 대구역 광장을 거쳐 대구경찰서 앞을 지나 교원노동조합 사무실까지 시위행진을 진행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운동]

대구에서는 1960년 6월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가족이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하여 경북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5월 30일에 결성된 경북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에서 비롯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선언문을 통하여 스스로를 “우리들은 민주 건국 발전사상에 있어 유례없는 오점과 반민족적 죄과를 범한 동족 대학살에 희생된 원혼의 유가족들에 의하여 조직된 피의 결합체”로 규정하고, 민족적 비극인 ‘검은 역사의 무덤’을 만들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 당면 과업으로 헌법에 규정된 기본 인권 보장, 예방 학살의 정치 도의 확립, 학살 피해에 대한 국가 형사 보상, 합법적 절차를 통하여 관련자에 대한 집단 고발 및 처단, 피학살자 원혼탑 건립, 불법적 반민족 현상에 대한 비판 시정 등을 삼부에 건의·요구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결성대회 이후 7월 말까지 임원을 구성하였다. 임원진은 고문, 고문 변호사단을 두고 회장 신석균, 부회장 안귀남·이홍근, 이사 조창희, 함승호, 한석동, 조창희, 김정두, 백오윤, 박정서, 박대형, 정태흠, 김봉환 등이었다. 총무위원 이상근, 원호위원 백대윤, 조사위원 이원식, 섭외위원 김동선, 부녀위원 김명선, 학생위원 이효철 등이 실무진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대구, 김천, 포항, 경주, 경산, 금릉군, 성주, 월성, 칠곡, 선산, 청송, 의성, 영천, 달성, 영덕 등 시군 유족 대표도 구성하였다. 특히 대구의 경우 이원식이 대표위원, 이복녕이 조사위원을 맡았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유족회 내에 청년부와 학생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12월 10일 대구지구피학살자유족회 명의로 회보 『돌꽃』을 발행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은 7·29선거 하루 전인 1960년 7월 28일 대구역 광장에서 유족 및 일반 시민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피학살자 합동 위령제를 개최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8월부터 대구의 가창을 시작으로 상인동송현동, 본리동, 미대동, 지묘동, 평리동, 파호동 등지의 학살 현장을 답사하고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8월 20일에 대구지구 피학살 희생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합동 묘비를 세우기 위한 합동묘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은 1960년 10월 20일 서울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개최한 전국유족회결성대회로 연계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장면 정권의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1961년 3월에 구성된 이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에 가입하여 각종 2대 악법 반대 시위와 궐기대회에 참석하였다.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대구에서는 1961년 2월 8일에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고 국회 비준을 저지할 목적으로 대구의 학생과 정당·사회단체들이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1961년 2월 10일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준비위원회, 사회당 등 16개 정당·사회단체가 모여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한미경제협정은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굴욕적인 조약이며,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상품 시장이 될 것을 강요하는 조약이라고 규정하였다.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협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협정의 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표방하였다.

대구에서 한미경제협정에 대한 움직임이 일자 민주당 경북도당은 1961년 2월 17일 대구역 광장에서 시국 강연회를 열어 경제 제일주의를 설명하였다. 민주당 경북도당의 시국 강연회는 들끓는 한미경제협정 반대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었으나 대구의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1960년 2월 21일 국회 개원일에 맞추어 국회의원들에게 호소문을 배부하는 한편 명동성당 앞에서 성토대회와 공청회를 개최한 뒤 가두 행진을 벌였다.

1961년 2·28 1주년 기념식에서 학생들은 “한국을 반식민지화하려는 굴욕적인 한미경제협정을 결사반대하고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라고 요구하며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하였다.

1961년 2월 28일 대구의 혁신계 11개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경북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위원회는 한미경제협정이 민의원과 참의원에서 비준되자 주권 침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이어 한미경제협정의 철회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대구의 학생과 정당사회단체가 벌인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은 1960년 6월 한미 간에 체결한 경제협정을 미국의 한국 예속, 주권 침해로 규정하며, 한국의 자주와 주권 수호를 일깨운 데에 의의가 있다.

[이대악법반대운동]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은 1961년 3월 8일과 9일 각 신문을 통하여 정부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각의에 상정하기 위하여 심의 중이고, 내무·법무 양 장관이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별도로 구상 중에 있다는 사실이 보도됨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2대 법안은 4·19혁명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민주·자주·평화에 대한 열망과 대중들의 집회·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반민주적 악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은 1961년 3월 18일 비가 오는 중에도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회가 개최한 ‘이대악법반대경북학생주최궐기대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회 후 학생들은 횃불시위를 벌였다. 또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은 1961년 3월 21일 대구역 광장에서 1만 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정당사회운동단체경북공동투쟁위원회가 개최한 ‘제2차 이대악법반대시민궐기대회’로 이어졌다. 이어 1961년 3월 24일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법안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반공법·데모규 제법 규탄 시위’가 열렸다.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1961년 3월 31일과 4월 1일 2일간에 걸쳐 이루어진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운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의 조직이었다.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공동투쟁위원회, 이대악법반대경북노동단체공동투쟁위원회, 이대법안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등 대규모의 3개 단체 연합이었다. 첫 행사로 1961년 4월 2일 대구역 광장에서 정부 당국의 집회 불허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대악법대구궐기대회 및 횃불 데모[대구데모사건]를 개최하였다. “반공이란 구실보다 배고프다. 통일하여 살아보자. 노동자 농민이여 일어서라. 학생들이여! 시민들이여!”, “국회는 해산하라.”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경찰 당국은 2,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회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후 대회 관계자 35명을 구속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3개 단체 연합 행사는 4·19 이후 긴장감을 불러온 최대의 데모 사건이었다.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은 1961년 4월 14일 수성천 변에서 이대법안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주최의 ‘이대악법 규탄 대회’로 이어졌다. 이대악법 규탄 대회에서는 ‘대구데모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의 즉각 석방과 2대 악법 철회 및 심의 중단 요구가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평화통일 운동]

대구 지역에서는 4·19혁명 시기 7·27총선거를 치른 이후 통일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60년 9월 민주구국동지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경북시국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1960년 11월 12일 경북시국대책위원회대구종로초등학교에서 평화통일에 관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여, 남북통일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경북시국대책위원회는 시국 강연회 직후 명칭을 ‘민족통일경북도연맹’으로 변경하고, 남북 간 인사 왕래와 문화 교류의 급속한 실현을 담은 결의문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민족통일경북도연맹은 혁신 세력의 통일적 연합체로서 조직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참가하였다. 1961년 2월 25일에 열린 민자통 결성대회에서 ‘민족 자주적이고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조국 통일을 기한다’는 대원칙이 제시되었다.

민족통일경북도연맹은 1961년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30,000명이 모인 가운데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평화적인 수단에 의한 민족 통일을 천명하였다.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연사들은 남북한 교역과 인사 교류, 서신 왕래, 기자 교류, 그리고 선건설 후통일 배격 등을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후 참가자들은 북성로에서 중앙통,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또 민족통일경북도연맹은 대구에서 교원노조가 결성되자 경북교원노동조합지원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교원노조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민족통일경북도연맹은 ‘경북민주민족청년동맹’이라는 청년조직을 결성하였다. 도예종, 서도원, 강왕수 등을 회원으로 한 경북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1년 1월 『영남일보』 등에 민족 통일에 관한 호소문을 싣는 동시에 1961년 2월 25일 대구역 광장에서 통일촉진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남북 문화 교류와 평화통일의 의미를 되새겼다. 경북민주민족청년동맹은 대구 지역 이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2대 악법 반대 시위나 궐기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혁신 세력 중 민자통의 통일 방안에 반대하면서 영세 중립화를 내세운 통일사회당은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을 결성하였다. 1961년 2월 26일 대구에서는 통일사회당경북도당준비위원회 주최로 시국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대구의 4·19혁명 시기 민주·민족운동의 의의]

대구의 4·19혁명 시기 민주·민족운동은 광복 후 개혁되어야 할 사회문제들이 이승만 독재에 의하여 유지 강화된 것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개혁 운동이었다. 교원노조의 설립이나 피학살자유족회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고, 학생들의 학원 민주화운동이나 신생활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선도적으로 진행되었다. 2대 악법 반대 투쟁과 평화통일 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혁신적인 선도성을 나타냈다. 4·19혁명 시기 대구는 전국의 민주·민족운동을 견인하는 위치에 있었고, 한국 현대 변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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