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92
한자 慶北靑年大會
이칭/별칭 경북지방쳥년대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25년 2월과 3월 무렵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청년운동 세력들이 개최한 두 개의 청년대회.

[역사적 배경]

1925년 무렵 대구 지역 청년운동 세력은 전국 사회운동의 방향과 연관되어 파벌 투쟁을 벌였다. 청년운동의 비합법 영역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주도한 화요회계는 지방 청년대회를 통하여 서울계가 장악하고 있던 청년운동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을 주도하고 있는 지방 청년운동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1925년 4월 20일 화요회 중심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개최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로 대립하면서 두 파벌 간의 대립은 절정을 이루었다.

[경과]

1925년 1월 화요회와 북풍회계의 대구청년회를 비롯한 7개 청년운동 단체가 1925년 2월 20일 경북 안동에서 경북청년대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1925년 2월 20일 안동에서 열린 경북청년대회 발기회에서는 경남 지역 화요회계와 연합하여 경상청년대회 개최를 계획하였으나 대회를 열지 못했다. 화요회 개최의 경북청년대회는 도 내 24개 단체가 참가하여 다과회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다과회에서는 청년운동의 근본정신, 청년 교양, 청년단체 조직, 회원 연령 제한[만 18~30세], 노동, 형평, 여성, 청년, 지방 청년운동 국면, 조선청년총동맹 가맹 등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한편, 서울계의 조선청년총동맹에서는 제2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사전 활동으로 경북청년대회 발기회를 1925년 2월 25일 대구청년회관에서 열고, 대구의 제4청년회와 같은 청년운동단체가 중심이 되고 도 내 14개 청년운동 단체가 참석하여 1925년 3월 10일 경북 김천에서 경북청년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서울계의 경북청년대회 발기회에서는 또한 대구청년회가 청년운동을 혼란케 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의 명령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대구청년회의 조선청년총동맹 제명을 건의하기로 하였으나 경북청년대회는 열리지 못하였다. 서울계의 경북청년대회에서는 도내 청년운동의 방향, 강령, 조직, 청맹 가맹, 무산 청년교육, 청년운동과 노동운동과의 관계, 민족적 청년단체 및 이류 청년단체, 연령 제한 문제 등을 토의할 예정이었다.

[결과]

두 개의 경북청년대회는 경북 지역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 사이의 파벌 갈등과 일제 관헌의 방해와 탄압으로 열리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북청년대회는 1920년 이후 청년운동의 급속한 고양에도 불구하고 전국 사회운동의 경향을 반영하여 계파별로 개최가 추진됨으로써 청년운동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구 청년운동은 향후 두 파벌의 통일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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