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설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137
한자 地名 說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정의]

대구광역시의 지명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지명 설화(地名 說話)에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유래 전설과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지명 전설이 있다. 지명유래 전설은 자연이나 사물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리상의 특징, 자연환경, 산이나 바위의 모양 등 소박한 지식으로 설명한다. 역사적 지명 전설은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지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채록/수집 상황]

대구광역시에서 전승되는 지명 설화는 1990년 대구직할시 중구에서 펴낸 『달구벌의 맥』,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과 2002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Ⅱ,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 등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에는 다양한 지명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다.

중구 대봉동에 있는 건들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때부터 생긴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바위 모습이 갓을 쓴 노인과 같다고 하여 ‘입암(笠巖)’, 즉 ‘삿갓바위’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건들바위를 대구십경(大邱十景)의 하나로 꼽았다.

북구 매남동 솔야(松野)에 있는 광야제(廣野堤)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고려시대에 노씨(盧氏) 성을 가진 사람이 여덟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특하였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어느 해에 여덟 형제가 함께 과거에 응시하여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가문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여덟 형제가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간신들은 노씨 집안이 다시는 발흥하지 못하도록 집을 헐어서 못을 만들고, 집안의 가재도구를 함께 수장하였다. 그 후 수장된 물건에 손을 대면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고 여겨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남구 대명동(大明洞)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는 두사충(杜師忠)과 관련이 있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출신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과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귀화한 장군이다. 두사충은 노년에 고향을 그리워하여 최정산(最頂山)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고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에 고국의 천자에게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남구 대명동의 자연부락 도촌(都村·棹村)의 유래 관련하여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이 마을에 도씨(都氏)가 많이 산다고 하여 ‘도촌(都村)’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1700년 무렵 홍수로 낙동강(洛東江)이 범람하여 배가 대명천(大明川) 부근에 대피하였는데, 낙동강 물이 줄어들면서 배가 다시 강으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게 되었다. 돛대가 걸려서 가지 못하였다고 하여 부근의 마을을 ‘도촌(棹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와서 귀화한 중국 장수 두사충장등산을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큰 배와 같이 길쭉하게 생겼으며, 가톨릭병원 남쪽 산골 지점이 배의 돛을 높이 달아놓은 것같이 보였다고 하여서 ‘도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북구 서변동에 있는 말샘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지금의 조야동 뒷산인 함지산의 정기를 받은 한 장군이 태어났다. 장군이 지금의 말샘에 이르자 한 마리의 준마가 샘에서 솟아 나와 장군을 태우고 무태(無怠) 앞들을 내달렸다. 그때 가남봉에 올라 말채찍을 정상에 꽂고 단숨에 팔공산(八公山) 쪽을 향해 뛸 때 남은 말발굽 자리가 지금의 연경동 뒷산에 있는 ‘말발굽바위’라고 한다.

북구 서변동에 있는 조산봉(鳥山峰)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무태 앞들을 대부분을 소유한 큰 부자 은씨가 살았다. 부자는 과객들이 끊일 날이 없자 어떻게 하면 손님을 줄여 재물을 덜 축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어느 날 시주하러 온 노승에게 부잣집 종부(宗婦)가 손님을 줄여 재물을 아낄 방법을 물었는데, 노승이 들 앞에 있는 산을 깎아 평평하게 들로 만들면 손님이 끊어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산 중턱쯤 깎아 내자 갑자기 산속에서 학 세 마리가 날아올랐는데, 그 학은 산 지킴이였다. 놀란 종부가 산 지킴이 새를 건드리면 화를 입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머슴들에게 다시 산을 쌓아 올리라고 하였다. 그 산이 지금의 조산봉(鳥山峰·造山峰)이라고 한다.

중구 달성동에 있었던 미꾸라지 샘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 달성서씨(達城徐氏) 집에는 외아들이 앞을 못 보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온갖 약을 다 쓰며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어느 날 중이 미꾸라지를 잡아 고아 주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엄동설한이라 미꾸라지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미꾸라지를 구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얼른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전에 없었던 웅덩이에 미꾸라지가 헤엄을 치고 있어 잡아서 정성껏 고아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웅덩이에 다시 가 보니 미꾸라지는 없고 샘만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미꾸라지가 나온 그 웅덩이를 ‘미꾸라지 샘’으로 불렀다.

남구 봉덕동(鳳德洞)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897] 시절에 흉년이 계속되어 나라 사정이 어려웠는데, 이 동네 터줏대감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수도산(水道山) 기슭에 있는 웅덩이 물을 저녁마다 떠서 봉황이 마시도록 부근에 놓아두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연 물줄기가 잡혀 훌륭한 저수지를 만들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터줏대감에게는 대봉(大鳳), 봉덕(鳳德), 봉산(鳳山)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다. 터줏대감이 아들 삼형제에게 근처의 논밭을 물려주어 살게 한 것이 바로 대봉동, 봉덕동, 봉산동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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