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972
한자 -俱樂部
이칭/별칭 키네마극장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관|개장 시기/일시 1938년 8월 21일연표보기 - 키네마구락부 개관
개칭 시기/일시 1943년 4월연표보기 - 키네마구락부에서 대구보총극장[대구다카라즈카극장]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대구보총극장에서 문화극장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53년 2월 14일연표보기 - 문화극장에서 국립중앙극장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국립중앙극장에서 구 국립극장으로 명명
개칭 시기/일시 1967년 9월 17일 - 한일극장 개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5년 11월 2일 - 한일극장 폐관
최초 설립지 키네마구락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39[동성로2가 88-22]지도보기
성격 극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2가에 있던 극장.

[건립 경위]

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8월 21일 조선영화흥업주식회사에서 대구부[현 대구광역시] 동성정(東城町) 2의 88번지, 지금의 CGV대구한일 자리인 중구 동성로2가 88에 개관하였다.

[변천]

키네마구락부의 1940년 1월 당시 경영주는 대구영흥상회였고 지배인은 호리코시 유지로[堀越友二郞]였다. 1940년 12월 당시 경영주는 호리코시 유지로였고 지배인은 아카키 센지[赤木專治]였다. 키네마구락부는 개관 이후 「츠루하치 츠루지로[鶴八鶴次郞]」, 「어화(漁火)」, 「앵(鶯)」, 「국경(國境)」, 「신천지(新天地)」, 「월후사자제(越後獅子祭)」, 「화장설(化粧雪)」,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海の荒鷲]」 등을 상영하였다.

1943년 4월 키네마구락부에서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대구다카라즈카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대구보총극장에서 문화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53년 2월 14일 6·25전쟁으로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을 대신하여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되었다. 1957년 서울에 국립극장이 재개관하자 경상북도에서 관리하면서 ‘구 국립극장’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개인에게 불하되어 1967년 9월 17일 한일극장이 개관하였다. 한일극장은 1995년 11월 2일 신승수 감독의 「아찌 아빠」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였다.

[구성]

키네마구락부는 옥단건축사무소(玉團建築事務所)가 설계하고 야시로쿠미[屋代組]가 시공한 대구 최초의 철골·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었으며 대부분 일본에서 가져온 최신 자재로 지어졌다. 건평 801.9㎡·연건평 2,046㎡,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였고 정원은 830여 명이었다. 최신 구조와 공법을 사용하여 지은 키네마구락부는 외관과 함께 내부 공간이 웅장하였다. 외관은 비대칭형이었고 좌측 부분은 원통형(圓筒形) 탑으로 구성되었다. 곡면 창과 원형 창 등을 부가한 외벽은 서구의 표현주의적 색채를 띠어 큰 구경거리였다. 1940년 12월 당시 수용 인원은 1,500명, 종업원은 25명이었다.

[현황]

1995년 11월 2일 폐관한 한일극장은 1997년 철거 후 재개발하여 2000년 11월 30일 7개 관의 복합상영관 씨네시티한일극장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 리모델링을 거쳐 2012년 12월 28일 CGV대구한일로 재개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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