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65
한자 李相和
영어공식명칭 Lee Sanghwa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5월 22일연표보기 - 이상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이상화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이상화 카프 중앙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이상화 교남학교 교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이상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48년 - 대구 달성공원 내에 이상화 시비 제막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상화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성내동 -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이상화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시인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카프 중앙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1901년 5월 2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대구지회ㄱ당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민족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가계]

이상화의 본관은 월성(月城)이며,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형은 이상정(李相定)이며, 동생은 이상백(李相伯)·이상오(李相旿)이다.

[활동 사항]

이상화는 1915년 서울 중앙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공부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8일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백기만(白基萬)과 함께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21년 5월경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에 참가하였으며,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을 겪고 난 뒤 귀국하여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이상화는 1925년 신경향파 문인들의 문학단체 파스큘라에 참여하고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중앙위원이 되면서 문학 활동의 전환을 맞이하였는데, 이 시기 여러 작품을 집중 발표하였다. 1927년 의열단원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장진홍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도 연루되어 다시 구금되었다. 이후 신간회 대구지회에 참여하여 출판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8년 8월에는 비밀결사 조직인 ㄱ당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이상화는 1933년 당시 경영난을 겪고 있던 교남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직접 교가를 짓기도 하였다. 1937년 3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을 만나기 위하여 3개월간 중국을 다녀온 후 교남학교 교사 활동을 이어 가다가 1940년 말 그만두었다. 이상화는 1943년 3월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4월 2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상화는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백기만·이상백 등과 함께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22년부터 1941년까지 20여 년간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을 시작으로 「나의 침실로」[『백조』, 1923], 「지난 달 시와 소설」[『개벽』60, 1926], 「시와 생활화」[『시대일보』, 1925],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문예운동』1, 1926], 「무산작가와 무산작품」1·2·3[『개벽』65·66·68, 192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70, 1926], 「역천」[『시원』, 1935], 「서러운 해조」[『문장』25, 1941] 등이 있다.

[묘소]

이상화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화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구 달성공원에 「마돈나여 나의 침실로」를 새긴 이상화 기념 시비가 세워졌다. 그 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시인 이상화 화상’ 동상이 세워졌고, 수성못에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85년 죽순문학회상화 시인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하고 있다. 2008년 2월 이상화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고, 2008년 8월 광복 63주년을 맞아 이상화가 사망하기 전까지 머물던 이상화 고택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상화 고택’은 2020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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