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33
한자 大邱- 名文家, 李相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시인 이상화 집안의 활약상.

[개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는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과 우국지사인 큰아버지 이일우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경주이씨 집안의 풍조를 내면화하고 있는 이상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훌륭한 인재를 키운 가풍을 들여다보면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 이상정]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1896년 6월 10일 한 아이가 태어나 훗날 독립운동가로 자라난다. 이상정(李相定)[1896~1947]은 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의 형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상정 자신의 재능이 특출하고 국내외에서의 업적이 크다. 이상정은 대구의 명문 ‘경주이장가(慶州李庄家)’에서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 김화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큰아버지인 소남 이일우에게서 자라난다. 이일우는 맏조카인 이상정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가르치며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상정은 어린 나이에 이일우가 설립한 우현서루(友弦書樓)의 강학원에서 사숙하면서 신구학문을 수학하였다. 덕분에 이상정은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통하였고 중국의 이름난 시문과 역사를 암기할 정도로 박학하였다. 그 후 신학문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하여 이상정은 1912년경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상정은 약 5~6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미술, 역사학, 상업, 군사학 등 현대적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이 무렵인 1913년 5월에 경북 청도 출신인 한문이(韓文伊)와 혼인하니 첫 번째 부인이 된다. 1918년 12월에 외아들인 이중희(李重熙)[1918~1990]가 태어났다. 일본 국학원대학을 졸업한 이상정은 그 해부터 대구계성학교와 대구신명여학교 등의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1920년 대구청년회에 가입하고, 1925년 1월 대구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인 용진단(勇進團)의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상정은 전각에 능한 서예가이자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1921년에는 대구에서 서양화 개인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서구 미술세계를 대구에 들여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상정은 쑨원의 삼민주의에 감화를 받아 중국에 망명하게 된다. 1925년 중국 화북성 등지에서 군 참모부의 막료로 근무하였으며,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권기옥(權基玉)[1901~1988]을 만나 두 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 권기옥은 3·1운동에 참여하여 실형을 살았던 항일 투사이다.

이후 이상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적극 활동하였으며, 광복군 창설을 지원하였고 무장투쟁을 지휘하는 등 독립운동노선의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 중국 지역의 한인 귀환에 힘쓴 이상정은 1947년 귀국하였으나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독립운동가 이상정은 중국 망명 당시부터 쓴 글을 엮은 『표박기(飄泊記)』[떠돌아다니며 쓴 기록]를 육필원고로 남겼다. 백기만이 정리하고 정하택이 발문을 써서 1950년 2월 15일, 대구 동성로3가 12번지에 있던 청구출판사에서 활자본으로 출간하였으니, 제목은 『중국유기』로 나왔다. 이상정의 책은 개인적인 수기를 넘어선 독립운동가의 생활과 당시의 시대상을 밝혀 주는 근거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부는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군사전문가인 이상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7년 4월, 국가보훈처는 이상정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소남 이일우 선생과 우현서루]

독립운동가 이상정, 저항시인 이상화, 우리나라 최초의 IOC위원이자 사회학자인 이상백, 수렵가이자 대한체육회사격연맹 제4대 회장 이상오 등 네 명의 형제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큰아버지 이일우에게서 자라난다. 1870년에 대구의 집에서 태어난 소남 이일우는 동생이 일찍 별세하자 슬하의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키워 학업과 혼사 등을 모두 책임졌다. 이일우는 당시 대구 지역의 대지주이자 명망가로서 서상돈·김광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한 핵심 인물이다.

이일우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던 1910년을 전후하여 상공업 분야에 뛰어들어 대구은행, 농상공은행 등의 주식을 소유한 대구 지역의 자산가로 성장하였다. 장남 이상악(李相岳) 또한 아버지 이일우의 자산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주조(酒造)와 섬유, 금융업계를 선도하였다. 이일우는 시인 이장희의 아버지인 이병학 등과 더불어 대구 지역 농상공 업계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일제가 제안하는 관직은 거절함으로써 지사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일우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계몽교육의 선구자적인 측면 덕분이다. 이일우는 35세이던 1904년 서울을 유람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실감하였다. 서구문명이 옮겨온 정세를 파악하고 옛 전통에만 얽매여서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에 대구로 돌아와 영재를 교육할 계획을 세우고 넓은 집 하나를 개설하면서 1905년 ‘우현서루(友弦書樓)’라 하였다. 우현서루에는 큰 서고(書庫)가 있어 동서양의 고금 서적 수천 종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뜻 있는 자들의 열람을 허락하는 동시에 신구 학문을 수시로 연구하게 함으로써, 총명한 선비들을 초대하여 일 년에 수십 명씩 양성하였다. 우현서루는 초창기 근대교육기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당시 우현서루가 얼마나 문화적인 파급력을 가졌는지는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기사들로 확인할 수 있다.

“대구 서문 밖 후동 사는 이일우 씨는 일향에 명망 있는 신사인데 학문을 넓히 미치게 하고 일반 동포의 지식을 개발코자 하여 자비로 도서관을 건축하고 국내에 각종 서적과 청국에 신학문책을 많이 구입하여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요금 없이 서적을 열람케 한다 하니 이씨의 문명사업은 흠탄할 바더라.”

“대구 서문에 있는 유지신사 이일우 씨는 일반 동포를 개도할 목적으로 자본금을 자당하여 해지에 ‘우현서루’라 하는 집을 신축하고 내외국에 각종 신학문 서적과 도화를 수만여 종이나 구입하여 적치하고 신구학문에 고명한 신사를 강사로 청빙하고 경상 일도 내에 중등학생 이상에 자격되는 총준 자제를 모집하여 그 서루에 거접케 하고 매일 고명한 학술로 강연 토론하며 각종 서적을 수의 열람케 하여 문명의 지식을 유도하며 완고의 풍기를 개발시키게 한다는데, 그 서생들의 숙식 경비까지 자당한다 하니 국내에 제일 완고한 영남 풍습을 종차로 개량 진보케 할 희망이 이씨의 열심히 말미암아 기초가 되리라고 찬송이 헌전한다니 모두 이씨 같이 공익에 열심하면 문명사회가 불일 성립될 줄로 아노라.”

이처럼 이일우는 민족자산을 축적하고 근대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지역의 인재 양성과 지원 등을 함으로써 많은 독립지사들을 후원하였다. 이일우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군 장성의 신분으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조카 이상정을 그리워하는 시를 여러 편 남겨 손수 키우고 가르쳤던 조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우현서루를 운영하면서 이일우는 많은 애국청년을 양성하였다. 그중 이동휘, 박은식 같은 인물은 훗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특히 우현서루는 애국계몽운동과 연결되면서 대구의 지적·문화적 풍토를 주도하게 된다. 또한 우현서루는 구국정신과 학풍이 이어져 향토교육의 요람지가 되었다.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던 우현서루가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강제로 매각되어 1911년에 폐쇄되는 조치를 당하자 이일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일제에 강압에 의하여 우현서루가 매각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자료가 지난 2017년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이일우 고택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현서루의 터에서 신식학교인 교남학교가 1921년에 개교하였으며, 교남학교가 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대륜중고등학교동창회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대륜80년사』에 따르면 우현서루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본교가 고고의 성을 울린 산실은 우현서루다. 위치는 대구부 팔운정 현 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되는 지점인 대구시 수창동 101-11번지[현 대구은행 서성로 지점] 약 700여 평의 부지였다. 한말지사로서 이 서루를 거친 분은 150여 명이 넘었다.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이동휘(李東輝), 조성환(曺成煥) 등과 김지섭(金祉燮) 열사들이 이곳을 거쳐 나간 것만 보더라도 그 업적을 짐작할 수 있고, 근대 우리 민족 정기의 본원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우현서루에서 보관하였던 책의 일부분인 사부총관 등 3,937권은 후손의 기증으로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 DGB대구은행북성로 지점에는 건물 전체에 소남 이일우 상을 모자이크로 제작하여 오가는 이들이 우현서루의 옛터를 알 수 있도록 힘썼다. 이처럼 이일우는 대구를 대표하는 부호였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존경받을 만한 행적을 남겼다.

[여전히 대구에서 살아가는 시인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저항시를 집필한 시인 이상화대구교남학교에서 3년 동안 영어와 작문을 지도하였고, 교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오늘날의 수성구와 남구 대명동 지역 대부분은 논으로 이루어진 들판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 이상화는 이 지역을 거닐며 하나의 시상을 떠올렸고, 1926년 잡지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현실을 ‘빼앗긴 들’에 비유하며, 이곳에 서 있는 민족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해방 후에도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이자 대구 시민의 자랑이 되었다.

이상화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교육자였던 큰아버지 이일우는 조선 청년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일깨워 준 우현서루를 운영하였다. 그 영향을 받은 이상화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적발되어 서울로 피신하는 등 평생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대구광역시는 도로명에서부터 이상화를 기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령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중동, 두산동을 잇는 길 이름이 바로 ‘상화로’이다. 또한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 상인동 방면에도 상화로가 이어진다. 대구근대골목체험 코스에는 이상화 고택이 포함돼 있으며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휴식처인 수성구 수성못, 달서구 두류공원, 중구 달성공원 등에는 이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또한 수성구민운동장역 궁전맨션아파트에는 이상화, 이육사, 서상돈 벽화가 있어서 일제강점기의 저항정신이 현대를 살아가는 대구시민의 일상에까지 전달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에 있는 ‘약령시 한의약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제강점기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있는데, 독립지사 ‘이상정 장군의 고택’을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이상화 고택에 들어가면 잘 가꿔진 정원과 멋들어지게 자란 나무가 그늘과 쉴 공간을 제공한다. 이상화 고택에서 이상화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1943년까지 4년 동안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화의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가 탄생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마당에는 수령이 200살가량 된 라일락이 있어 흔히 ‘이상화 나무’라 불린다. 이상화 고택은 도심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1999년부터 이상화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이상화 고택을 매입하여 지난 2005년 10월 대구광역시에 기부함으로써 이상화 고택을 지킬 수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로 나뉜 ‘ㄱ’ 자 한옥으로, 감나무와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고, 마당에는 장독대가 남아 있어 소박하고 정갈하였던 이상화의 생애를 반영하는 듯하다.

한편 이상화의 동생인 이상백(李相佰)[1904~1966]도 큰아버지 이일우가 세운 우현서루에서 공부한 뒤, 일찍 현진건, 이상화, 백기만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초기에 대구에서 ‘거화’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하여 저항 문인으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이후 이상백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서 지냈다. 이상백은 농구에도 두각을 나타내 한국체육회장으로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한국 체육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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