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16
한자 尹章赫
영어공식명칭 Yoon Janghye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3월 16일연표보기 - 윤장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윤장혁 신우동맹 책임비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윤장혁 혁우동맹 조직 책임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윤장혁 적우동맹 책임비서 선임
수학 시기/일시 1928년 3월 - 윤장혁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1월 - 윤장혁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0월 21일 - 윤장혁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3월 11일 - 윤장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 확정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 윤장혁 대구형무소 내 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윤장혁 전국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 - 윤장혁 대구 9월총파업 지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0월 - 윤장혁 대구 10월항쟁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2월 27일 - 윤장혁 특별군정재판에서 징역 5년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윤장혁 사망
출생지 신풍리 -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학교|수학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신우동맹 책임비서|전국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

[개설]

윤장혁(尹章赫)[1905~1968]은 1905년 3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대구에서 일어난 10월항쟁을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윤장혁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9월 남국희·이봉재·백대윤 등과 함께 사회과학 연구 동아리를 만들고 매주 토요일에 만나 학습을 진행하였다. 또한 대구의 사회운동가 장홍상(張弘相)[이명 장적우(張赤宇)·박광세(朴光世)·김점학(金點學)[이명 김선기(金善基)]·시바다[柴田健介] 등이 주도한 맑스주의 사상강좌회에 참가하였다.

윤장혁은 11월 15일 사상강좌회 강사이던 장홍상의 비밀결사 결성 제안을 수용하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대구공립중학교·대구농림학교 학생들과 함께 신우동맹을 결성하고 제1그룹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신우동맹은 12월 27일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혁우동맹(革友同盟)으로 전환하였고, 윤장혁은 조직 책임을 맡았다. 혁우동맹은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압박민족의 절대 승리를 기한다’라는 표어를 채택하였다. 1928년 2월 26일 혁우동맹원들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 ‘모순된 사회현상 타파’, ‘만인 평등 신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는데, 윤장혁은 이때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후 4월 30일 적우동맹은 ‘맑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학생운동을 실천적으로 행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일우동맹(一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다.

1928년 3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장혁은 고향 예천으로 돌아가 한동안 잡화상을 운영하였고, 11월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교 투쟁으로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는 바람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윤장혁은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원심이 확정되었다. 윤장혁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30년 6월 5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수감된 장진홍이 갑자기 사망하자 대구형무소 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의 가형(加刑)을 언도받았고, 10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5월 26일 만기 출소하였다.

윤장혁은 광복 이후인 1945년 12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대구전매노동조합 노동자들이 배가 고파 궐련을 마는 데 쓰이는 풀을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가혹 행위를 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파업 농성에 개입하였다.

윤장혁이 의장으로 있던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1946년 9월 23일 철도기관구노동조합 파업을 시작으로 대구의 9월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윤장혁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산하에 9월 총파업을 지도할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미군정 당국과 총파업 협상을 벌였는데, 당시 미군정은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사무실에 붙은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 철거를 주요 협상 사항으로 설정하였다.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는 10월 1일 오전 대구역에 결집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 요구 조건 관철”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저녁에 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한 상황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군중 1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는 미군정과 경찰에게 책임을 추궁하기 위하여 10월 2일 아침부터 대구역 주변에 파업 노동자들을 총집결시켰지만 오전 11시경 미군정 무장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윤장혁은 「미군정 법령 제19호」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특별군정재판에 회부되었고, 1947년 2월 27일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5월 22일 대전형무소로 이감하였다. 윤장혁은 1968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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