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767
한자 安泳枓
영어공식명칭 An Yeongd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안영두 대구 계성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안영두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출생지 굴화리 -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
학교|수학지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안영두(安泳枓)[?~?]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안영두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8일 안영두심문태(沈文泰)·김삼도(金三道)·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안영두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어 출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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