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84
한자 第二會 慶尙北道物産共進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8년 10월 31일연표보기 -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 개회
종결 시기/일시 1918년 11월 19일 -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 폐회
성격 산업 전람회
관련 인물/단체 경상북도|대구협찬회

[정의]

1918년 경상북도가 일왕의 생일을 기하여 20일간 실행한 물산공진회.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는 1913년 제1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한 이래 5년이 지난 1918년에 제2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1917년 10월부터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1918년 3월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관민 합동의 대구협찬회(大邱協贊會)를 조직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경상북도는 제1회 물산공진회가 실시된 이래 5년 동안 경북의 인구와 산업, 생산고가 발전한 것으로 판단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날 경제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가 경제성장에 이바지하였던 것으로 치장하고 선전하려는 목적에서 제2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경상북도는 제2회 물산공진회의 취지서를 통하여, “…물산력의 충실이 민력의 충실이 되고, 민력의 충실이 국력의 충실이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물산공진회의 개최를 선전하였다.

[경과]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하여 1918년 10월 31일부터 11월 19일까지 20일간 잠업강습소와 그 주변에서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물산공진회에 출품할 상품의 대상은 농산물, 원예품, 잠업품, 축산품, 임산물, 수산품, 공산품, 경상북도가 주산품인 참고될 만한 상품, 기타 금융조합 사업, 각 군세 상황, 일왕 및 총독 은사 사업 성적 등이었다. 대부분의 출품은 경상북도 생산물로 하되 주류는 조선 및 일본의 상품도 출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상북도물산공진회에 출품할 상품 규모는 농산품 6,000점, 임산품 100점, 축산품 300점, 잠업품 1,200점, 원예품 1,300점, 참고품 1,100점, 부·군·도세 상황 24점, 은사 사업 성적 100점, 실지 지도 100점 등 합계 1만 3074점을 예상하였다. 또 물산공진회의 진열관은 농산관, 원예관, 공산관, 수산관, 임산관, 참고관, 교육관, 금융관, 심세관(審勢館), 실지 지도관 등 모두 13개로 구성하였다.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의 필요 예산은 지방비, 국비, 군·도 공동경리비 등 3종류에서 전체 6,700원으로 계상하였다. 경상북도는 관람객 규모를 30만 명으로 예상하였다. 관람객 규모를 채우기 위하여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교육 전람회, 축산단체 연합회, 회의소 연합회, 미술품 전람회, 격검 대회 등 각종 행사를 유치하고, 도청 주최의 학교장 회의, 금융조합 이사회, 적십자사 및 애국부인회 등 각종 회의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 관객 동원을 위하여 공진회 관람 때 각종 철도 이용 금액의 할인, 학생 및 군인의 관람료 반액 할인, 단체 할인 등을 시도하였다.

[결과]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1918년 11월 15일에 물산공진회 회장 내 식장에서 조선총독을 대리한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 정무총감이 표창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15만 8960여 명의 관람객을 유치한 성과를 내고, 1918년 11월 19일 오후 1시 폐회식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1913년 제1회 물산공진회에 이은 두 번째 물산공진회였다. 경상북도는 경상북도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선전할 목적으로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더욱이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는 철저히 총독부의 지방 지배 기관인 경상북도와 대구·경북의 일본인 중심으로 개최됨으로써 일본이 식민지 조선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 부각하기 위한 행사로서 의미가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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