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22
한자 藥令市 復活推進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 발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8년 10월 28일 - 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 제1회 대구약령시 축제 개최
성격 경제단체

[정의]

1978년 대구광역시에서 약령시를 부활하기 위하여 설립한 경제 단체.

[개설]

대구 약령시(大邱 藥令市)는 1658년(효종 9)부터 경상감영의 객사(客舍)인 달성관 주변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리던 조선시대 전국 최대의 약령 시장이었다. 봄에 열리는 약령시는 춘령시(春令市), 가을에 열리는 약령시는 추령시(秋令市)라고 하였다. 대구 약령시는 1908년 일제에 의한 경상감영 객사 철거로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으로 이전하였다. 대구 약령시는 민족의식 앙양의 집결지라고 판단한 일제에 의하여 지속적인 탄압을 받다가 1941년 폐시(閉市)되었다. 광복 후 잠시 열리기도 하였으나 6·25전쟁 발발로 다시 폐시되었다.

[설립 목적]

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藥令市復活推進委員會)는 1948년 이후 맥이 끊어졌던 대구 약령시를 부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대구 약령시는 1948년 추령시[1948년 1월 1일~1948년 2월 15일경]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6·25전쟁 이후 대구시한약사협회를 중심으로 대구 약령시 부활책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구시의 무관심과 대구 약령시 부활을 이끌 구심 세력이 없어 유야무야되었다. 대구 약령시 부활은 크게 1963년, 1973년, 1978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약령시의 부활을 위한 노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 당시 「약사법」 개정을 둘러싸고 권업 수호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대구의 한약업계는 약령시의 부활이 시급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1961년 11월 5일 제2대 대한한약협회 경상북도지부장 유판학은 ‘한약의 진흥을 위한 적극 시책 확립의 건’이라는 건의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하였다. 건의서는 한약재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수출을 증대하고, 한약종상 시험을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각 도에 한약을 전담하는 과와 계를 둘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한한약협회에서도 각 시도 대표로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정부에 한약업자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법령 개정을 요구하였다. 5·16군사정변을 이끈 세력들은 낙후한 농어촌의 소득 증대가 중요한 정책이었기 때문에 특용작물 재배 장려 등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에 관심이 있었다. 특히 경상북도에서는 전국 약초 생산의 절반이 넘는 양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판로 개척이라는 측면에서도 대구 약령시의 부활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1963년 2월 13일과 2월 14일 이틀에 걸쳐 대한한약협회 경상북도지부장 유판학, 경상북도 의약과장 등이 모여서 대구 약령시 부활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경상북도 관계자들은 ‘약령시부흥위원회’를 결성하여 대구 약령시 부흥에 관한 내용을 서면으로 검토하고, 대한한약협회 경상북도 회원들은 대구 약령시가 부활되면 한약 부흥에 대한 연구와 노력으로 도민 보건 향상과 농가소득 증대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

1963년 3월 26일 유판학, 유병열, 노시하 등 12명이 남성한약방에 모여 ‘대구약령시부흥대책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한 뒤 임원단을 구성하고, 규약을 정하였다. 그러나 대구약령시부흥대책위원회는 별다른 활동도 없이 흐지부지 해체되고 말았다.

10년이 흐른 1973년 대구시장 이규이에 의하여 대구 약령시의 부흥이 다시 거론되었다. 대구시장 이규이는 재임 기간 대구를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시민의 보건 향상, 대구 경제의 활성화, 경상북도 지방의 약초 재배 농민들의 소득 증대 등 다방면에 걸친 효과를 내기 위하여 대구의 명물이었던 약령시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구시장 이규이가 임기를 마치고 떠남에 따라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1978년 5월 대구 약령시 시세사정위원회가 월례회에서 월 2회씩 정기휴일제를 갖도록 결의를 하면서 다시 대구 약령시 부활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구 약령시 시세사정위원회는 1978년부터 매월 1·3주 일요일을 정기 휴일로 정하고, 회원 간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대구 약령시를 부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때 대구시한약협회는 한약업사 영업지 제한을 완화하여 주고, 저리융자 등 경제적 뒷받침 및 세제상 혜택과 함께 한약재 무역상들을 대구에 유치한다면 약령시 부활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 6월 20일 대구시청에서 대구시한약협회 회장단과 대구시 관계자들이 논의를 거쳐, 대구시는 대구시민축제 기간인 1978년 10월 28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령시를 개장하도록 인가하였다. 1978년 9월 28일 약령시 개장에 따른 추진 계획안이 확정되었고 약령시준비위원회에서는 약령시 참가 범위를 남성로동성로 일대 한약방 46개소, 위탁 상회 13개소, 한의원 18개소, 기타 22개소 등 100개소로 결정하였다.

1978년 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가 발족을 하였고 1978년 10월 28일 대구 약령시의 개장을 기념하는 행사로 제1회 대구약령시 한방문화축제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마다 약령시 한방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구 약령시의 부활 이후 소규모 약령시가 열렸던 진주와 전주 등지에서도 약령시 재현 움직임을 보였다.

[의의와 평가]

약령시 부활추진위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맥이 끊어졌던 대구 약령시를 부활시켜 한방 문화 계승에 이바지하였으며, 대구 약령시가 세계적인 한약재 유통의 거점으로서 명성을 떨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대구약령시』 (약령시부활추진위원회, 1984)
  • 대구약령시 한의약박물관(http://www.daegu.go.kr/dg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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