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17
한자 大邱神社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4년 4월 3일연표보기 - 대구신사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7년 5월 15일 - 대구신사 국폐소사로 승격
해체 시기/일시 1966년 8월 13일연표보기 - 대구신사 철거
최초 설립지 대구신사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3]지도보기
성격 신사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 있었던 신사.

[설립 목적]

대구신사(大邱神社)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일본인들이 일본의 국민도덕, 국민정신, 국민문화의 근원인 황민(皇民)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를 함양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변천]

대구신사는 요배전(遙拜殿)의 건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3일 대구의 수비대장 야마타[山田] 중위, 경찰서장 아리마[有馬], 대구일본거류민회 회장 타도코로[田所] 등이 대구 달성(達城)에 요배전 건립 예정지 표목을 세우고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였다. 1906년 5월 대구일본거류민단이 2,500원의 예산으로 달성에 ‘황태신궁 요배전(皇太神宮遙拜殿)’의 건립을 추진하고,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하여 낙성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의 일본인 사회는 요배전 건립 이후 1907년 3월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하고 달성공원을 조성하였다. 대구신사는 1914년 4월 3일 신무 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기하여 건립되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대구신사의 관리가 대구부청으로 이관되었다. 대구신사는 신사 유지 경영 규약을 만들고, 대구부로부터 신전(神殿) 사무소 부속 건물과 비품 등을 무상으로 대여받았으며, 1914년부터 20년간 달성공원 15만 3669㎡ 가운데 5,077㎡를 신사 경내지로서 무료로 사용하였다.

1921년 3월 대구신사를 확대 개축하기 위하여 대구부윤을 회장으로 하는 ‘대구신사조영봉사회’를 구성하였다. 대구신사는 9채나 되는 건물을 거느릴 만큼 컸고, 대구신사의 제신은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황대신(天照皇大臣)이었다.

1936년 8월 일제가 신사 제도 개정에 관한 칙령을 발포함에 따라 대구신사는 1937년 5월 15일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소사(國幣小社)로 격상되었다. 대구신사는 전시체제기에 내선일체를 기저로 하는 황국신민화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현장이 되었다. 대구신사에서 대구부국민정신총동원 경북연맹 공동주최로 ‘총후봉공기도대회’를 열기도 하고 신사 안에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을 지어 국체와 정신 함양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게다가 일제는 초등학교 1학년에까지 매월 2회 정도 대구신사를 참배하도록 강제하였다.

[현황]

1946년 8월 8일 ‘8·15해방 1주년 기념 준비위원회’의 첫 기념행사로 달성공원 광장 중앙에 세워진 대구신사의 도리이[鳥居]가 철거되었고, 대구신사는 1966년 8월 13일 대구광역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신사는 일제의 황민 내셔널리즘의 이념이 표현되고, 일본 근대 민족성이 발휘되는 공공의 신성한 장소였다. 전시체제기 황국신민화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신사참배가 강제되는 장소로서 황국 내셔널리즘이 발휘되는 장소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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