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30
한자 靑蘿-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의 종교와 예술이 움튼 청라언덕.

[개설]

청라언덕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 언덕을 일컫는 말이며, 선교사들이 심어 놓은 푸른 담쟁이[靑蘿]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에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구절로 인하여 더욱 낭만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장소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환승역]

대구도시철도 2호선 반월당역의 바로 다음 역인 청라언덕역대구도시철도 3호선과 만나는 환승 구간이다. 서문시장역이나 남산역에서도 한 정거장인 청라언덕역 일대가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인 언덕인지는 역 이름이 말하여 준다.

‘청라언덕’이라는 아름다운 발음이 오늘날까지 오래 맴도는 것은 가곡 덕분이다. 박태준이 첫사랑을 노래한 「동무생각」에 여러 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청라언덕 「동무생각」 노래비 앞에서는 곡을 찾아 듣거나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작곡가 박태준 외에도 시인 이상화, 윤복진, 화가 서동진, 이인성 등이 청라언덕을 오르내리며 예술혼을 불태웠기에 한국 근대 예술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대구의 몽마르트]

대구광역시 도심 한복판에서 낭만적인 여행을 하기에는 청라언덕 코스 만한 곳이 없다. 선교사가 살던 이국적인 집을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나라에 근대 의료기술을 퍼뜨린 의료기구를 보는 일은 금세 100년 전 대구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사용한 금바늘과 1950년대에 쓰인 마취기 등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특히 청라언덕의 이름처럼 푸른 담쟁이로 둘러싸인 벽돌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여서 고풍스러운 멋이 전해지는 곳이다. 초록색 잎사귀와 붉은 벽돌이 이루는 조화는 서양의 저택을 연상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 그대로이다.

1899년 선교사로 온 이들이 직접 살던 곳인 만큼 각각의 집에 선교사의 이름이 붙어 있다. 잔디 깔린 마당에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집이 선교사 블레어가 살던 주택이다. 1901년 입국하여 평양에서 주로 활동한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주택 2층 박공 부분에 반원형 창을 만들었는데, 이는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기능을 하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선교사블레어주택은 현재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동서양의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만든 스윗즈 주택은 당시 건축 기술을 엿보게 하는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대구읍성의 성곽 돌인 안산암을 깔아 기초를 세우고 기와지붕을 얹음으로써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도록 애썼기 때문이다. 마르타 스윗즈(Martha Switzer)는 독신으로 18년간 교육선교에 헌신하였던 여성 선교사다. 스윗즈는 집 앞의 은혜정원에 묻혀 있으며 선교사스윗즈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를 간직한 채 미국의 주거양식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붉은 벽돌 2층집은 챔니스가 살던 집이다. 선교사챔니스주택은 현재 의료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2017년 11월에는 챔니스 선교사의 손자 데이비드 챔니스와 손녀 수전 챔니스가 할아버지가 살던 챔니스 주택을 찾아오기도 했다. 1925년 대구에 온, 본 챔니스 선교사는 서구 내당동에 있는 애락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챔니스 선교사가 찍었던 사진 뒷면에는 ‘대구, 조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다. 선교사챔니스주택은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 앞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동산의료원 초대 병원장이었던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가 심었던 대구 최초의 서양사과나무 자손목이다. 존슨 박사는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이던 1899년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 묘목 72그루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구 중구 남산동 사택 주변에 심었다. 그 마지막 남은 자손목이 바로 지금 청라언덕에 있는 나무인데, 1998년 남산동에서 현재의 청라언덕으로 옮겨졌다. 대구광역시를 사과의 고장으로 만든 시조목인 이 나무는 100년 사과나무로 불리며 2000년도에 대구광역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담쟁이에는 둥근 흡착근(吸着根)이 있어 어딘가에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멀리서 온 선교사들이 ‘대구’라는 타지에 정착하기 위하여 애쓴 흔적과 잘 어울리는 식물이라 할 수 있다. 청라언덕의 푸른 담쟁이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 다음 세대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

선교사 주택 사이에 있는 청라언덕박태준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동무생각」 노래비와 어우러져 역사와 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는 장소다. 「동무생각」 속 짝사랑하는 여학생에 대한 애틋한 감성이 언덕 곳곳에 묻어나 있어 대구광역시의 중·장년 세대가 특히 좋아하는 공간으로 분류된다. 타지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 함께 걸을 장소로 청라언덕을 선택한다면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는 시점부터 다시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은 만큼 풍성한 볼거리가 제공되는 곳이다.

[대구 근대골목투어 출발지로서의 청라언덕]

청라언덕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의 동산동달성토성이 중심이던 시절에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읍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청라언덕은 남서쪽에 있다. 대구읍성의 북쪽 편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조선인들은 남서쪽에 살았다. 개화기 들어 대구에서 교세를 확장한 천주교의 중심지와 개신교의 중심지는 남서쪽에서 조선인들을 향한 포교 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포교 활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천주교의 계산성당과 개신교의 제일교회가 도로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 청라언덕은 장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이 몰래 시신을 묻던 곳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살던 사람들도 굳이 오르지 않던 장소였는데, 외국인 선교사들은 대구에 정착하기 위해 험지를 선택하였다. 시체가 있어 께름칙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종교 활동과 의료 활동, 교육 활동을 펼치기에 손색이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선택은 적중하였다. 실제로 청라언덕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활동인 제일교회, 의료 활동인 동산병원, 교육 활동인 계성학교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중구의 근대문화골목 코스는 ‘골목도시 대구’라는 별명을 탄생시킬 정도로 인기 있는데, 그중에서도 청라언덕이 포함된 2코스를 찾는 이들이 가장 많다. 선교사주택 아래로는 3·1만세운동길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태극기가 전시되어있는 90여 개의 내리막 계단인데 1919년 3·1운동이 대구로 내려온 3월 8일 당시 집결지인 서문시장으로 향하던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소나무가 울창한 이 길을 이용하였기에 ‘3·1만세운동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많이 참여한 독립운동 장소인 것이다. 일부 주도적인 학생들은 교복이 아닌 장사꾼 복장을 한 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위한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드디어 시장 터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시작되었고, 곧장 1,00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장소가 청라언덕에 숨어 있다. 학생이 주축이 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며 대구의 도심을 향하였다. 현재 경찰역사체험관이 있는 당시 경찰서를 지나 종로거리에서 약전골목으로, 그리고 달성군청까지 이어 갔는데, 달성군청 자리는 현재의 대구백화점 자리에 해당한다.

온 거리를 메운 만세소리를 느끼며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계산성당을 둘러볼 수 있다. 1902년에 지어진 계산성당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2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성당 입구의 성수대는 1984년 5월 대구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직접 축복한 것으로 유명하며 영화 「검은 사제들」에도 등장한 바 있다. 계산성당을 지나면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으로 이어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이상화 고택에 머물렀다.

청라언덕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에게 자리 잡힌 근대적 의식은 진보적인 의식으로 발전하여 대구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과 민족저항운동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유명관광지와 재래시장 등을 둘러볼 수 있는 도심순환 골목투어버스의 이름을 ‘청라’라고 지음으로써 대구시민들의 문화 쉼터로 새로 거듭나고 있는 청라언덕의 인기를 입증하고 있다.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매일 청라언덕을 오가던 계성학교 학생 박태준[1900~1986]은 새하얀 얼굴의 신명학교 여학생과 자주 마주쳤다. 동산 동편에 집이 있었던 박태준으로서는 서편에 있는 계성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하루 두 번씩 청라언덕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학생을 마주칠 때에도, 만나지 못할 때에도 사랑의 감정은 점차 커져 나갔다. 박태준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는데 1917년 교회에서 학생 합창단을 조직할 때 박태준의 형인 박태원이 지휘를 하였고 반주는 박태준이 맡을 만큼 음악적으로 재능 있는 형제였다. 혼성합창단으로 발전되면서 신명학교에 다녔던 여학생들이 함께하는데 이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학생인 유인경이 참가한다. 소프라노 리더의 역할을 맡은 유인경에게 박태준은 더욱 애정을 느끼지만 유인경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박태준은 평양의 숭실학교로 가면서 추억 속으로 남고 만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어른이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리움으로 쌓여 갔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마산 창신중학교의 음악교사가 된 박태준은 동료 국어교사인 이은상 시인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사연을 들은 이은상이 작시하고 박태준이 직접 곡을 붙여 아름다운 음악이 1922년 탄생하였으니 바로 「동무생각」이다. 「동무생각」의 1절 가사는 이러하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무생각」은 한국 음악사 최초의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동무생각」은 음악적으로 멜로디가 감미롭고 문학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원형을 자극하여 긴 세월 동안 애창되고 있다. 노래 전반부는 동요 형태의 단순한 4/4박자 리듬이지만 후반부로 가면 9/8박자의 변박으로 변화를 주는 기법으로 감정이 고조되는 느낌을 자아내 예술성을 더한다. 「동무생각」박태준 작곡가와 이은상 시인을 더욱 절친한 사이로 만들었다. 이은상의 고종 사촌 동생인 김봉렬이 「동무생각」에 감화받았으며 결국 박태준과 김봉렬은 이은상의 주선으로 이듬해인 1923년 결혼하기에 이른다.

계산성당동산의료원 사이의 언덕길인 청라언덕에는 지금도 청소년 박태준의 순수한 그리움을 표현한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대구가 낳은 음악가 박태준은 마산 창신학교와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많은 가곡과 동요를 작곡하였다. ‘뜸북 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전 국민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동요 「오빠생각」도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의 작품이다. 박태준은 미국에서 합창 지휘를 공부한 후 돌아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국내의 합창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38년 창단한 대구 최초의 일반 합창단인 대구합창협회을 지휘한 인물도 박태준이었다.

2012년 대구문화재단에서는 음악극 「청라언덕」을 만들었는데 대구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청라언덕과 대구의 대표적 작곡가이며 한국근대음악의 근간을 세운 박태준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연극을 곁들인 음악극으로 완성되었으며 초연 당시 제목은 「박태준과 청라언덕」이었다.

음악극 「청라언덕」의 대본은 1부 ‘청라언덕에서 박태준을 생각하다’, 2부 ‘박태준과 친구들’, 3부 ‘박태준과 대구의 예술’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3부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역의 대사를 통하여 박태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에서는 박태준·현제명, 문학에서는 이상화·이장희·현진건, 연극에서는 한국 최초의 연출가 홍해성, 미술에서는 이인성.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한국 근대예술의 중심으로 활동하신 분들입니다. 대구예술의 역사가 곧 한국근대예술인 셈이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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