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02
한자 李一雨
영어공식명칭 Lee Ilu
이칭/별칭 덕윤(德潤),소남(小南)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 10월 27일연표보기 - 이일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8년 9월 - 이일우 독립협회 대구지회 설립 청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이일우 우현서루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이일우 우현서루 내에 시무학당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이일우 달서여학교 설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6년 8월 - 이일우 대구광학회 설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일우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100원 기부
활동 시기/일시 1908년 3월 - 이일우 대한협회 대구지회 창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이일우 대구전기회사의 중역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이일우 대구지주조합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4년 4월~1918년 4월 - 이일우 대구부협의회 의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일우 친일단체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이일우 대구은행 설립에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6년 9월 30일연표보기 - 이일우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이일우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지도보기
성격 계몽운동가|친일 자본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한협회 대구지회 총무|대구부협의회 의원

[정의]

개항기 대구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자본가.

[개설]

이일우(李一雨)[1870~1936]는 1870년 10월 2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 설립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자제단 설립에 참여하는 등 친일 행보를 이어 갔다.

[가계]

이일우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덕윤(德潤), 호는 소남(小南)이다. 아버지는 이동진(李東軫)이고, 어머니는 이인당이다.

[활동 사항]

이일우는 1898년 9월 독립협회 대구지회 설립 청원에 참여하였고, 12월 대구공립소학교의 15세 이상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개진협회(開進協會)와 사립 흥화학교 대구지교 설립, 달성학교 설립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04년 근대적 인재를 육성할 계획으로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설립하였고, 구학문을 바탕으로 신학문 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1905년 지식 개발과 국내외 신구서적을 통하여 시무에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우현서루 내에 시무학당(時務學堂)을 세우고 사립학교 설립을 학부에 보고하였다.

이일우는 1906년 8월 최대림(崔大林)·윤영섭(尹瑛燮)·김선구(金善久)·윤필오(尹弼五)·이종면(李宗勉)·이쾌영(李快榮)·김봉업(金鳳業) 등과 함께 대구광학회를 설립하여 교육운동과 식산흥업을 중심으로 하는 계몽운동을 벌였다. 서상돈(徐相敦)과 함께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를 세워 여성 교육에도 힘을 보탰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의연금 100원을 내놓았고, 금연상채회에 참여하여 전 국민의 대동 결의를 촉구하는 광고에 이름을 올렸다. 1908년 대구 금연상채회 명의로 경성지원금총합소에서 각도 대표자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는 광고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일우는 1908년 3월 대한협회 대구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6인의 임원선정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9월에 열린 총회에서 실업부장에 선임되었다. 1909년 대한협회 대구지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0년 3월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일우는 1911년 경북도청이 조선인과 일본인 공동의 교육회를 구성할 때 최대림·서상돈·서경순·이병학·이종면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대구전기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에는 50두락 이상의 전답 소유자로 구성되는 대구지주조합의 조합원이 되었다. 1914년 총독부가 대구부윤의 자문기구로 대구부협의회를 설치하자 2년 임기의 부협의원을 1914년 4월부터 1918년 4월까지 두 차례 역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친일단체 대구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일우는 1921년 5월 영남공제회가 경영하던 고아원에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영남공제회는 중추원 참의인 이병학이 회장으로 있었고, 서병조·정해붕·이장우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1923년에는 대구구락부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1년 대구은행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22년 경북산업자문회에 참여하였다. 이일우는 1936년 9월 30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일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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