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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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大遂 |
영어음역 | Gang Daesu |
이칭/별칭 | 강대진(姜大進),면재(勉哉),학안(學顔),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대진(姜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등이다.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 강익문(姜翼文)이고, 어머니는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다.
강대수(姜大遂)[1591~1658]는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청직(淸職)을 거쳤다. 1614년(광해군 6)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을 간언한 정온(鄭蘊)을 구하려다 사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풀려났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영남에 내려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청과 화친이 이루어져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740]에 따르면 강대수는 1639년(인조 17) 10월 동래 부사에 부임하였고, 이듬해 9월 재상(災傷)[자연재해로 인한 농작물 피해] 때문에 물러났으며, 선정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여러 내직과 외직을 역임한 후 1652년(효종 3) 이후로는 임금이 불러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고향 합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1645년(인조 23) 합천에 이연서원(伊淵書院)을 창건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하고, 1654년(효종 3) 의령에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어 이황(李滉)을 배향하였다.
저서로는 7권 3책의 『한사집(寒沙集)』이 있다. 강대수에 관한 서적인 『한사 선생 연보(寒沙先生年譜)』[강병주(姜柄周) 편, 1899]가 있다.
강대수의 묘는 경상남도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에 있다.
1728년(영조 4)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배향되었고,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 공원에 부사 강대수공 선정비(府使姜大遂公善政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