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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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渭悅 |
영어음역 | Mun Widong |
이칭/별칭 | 아산(我山)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468 봉림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부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사회 운동가.
문위열(文渭悅)은 1905년에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봉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아산(我山)이다. 서울 중동중학교와 경성법정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문위열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3월 김해 낙동강 주변의 대저, 김해, 녹산, 가락의 4개 면민 대표자들이 가락면에 모여 낙동강 일천식 공사(洛東江一川式工事)로 인한 해수 역류가 우려되어 해수방지회(海水防止會)를 조직했을 때 위원으로 선정되어, 면민들을 대표하여 생존권 수호를 위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4년 9월에 수재를 당한 1만여 명의 가락면민들이 면민 대회를 열고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 군 당국에 요청할 때 가락면민 대표 위원 14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배차수·김연성·김정석과 함께 4인의 상경 대표로 선정되어, 직접 조선총독부를 방문하여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문위열은 1939년 5월에 실시된 읍면 협의회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어 가락면 협의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그는 조선식량영단 가락공장장, 가락면장, 김해교육구청 교육위원, 김해 향교 전교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9월 1일 현 가락중학교 전신인 가락고등공민학교를 창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 때 김해군 갑구에 출마할 것으로 언론은 예상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면장을 역임한 후 독농가(篤農家)로서 농촌 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나섰다.
1968년 10월 한 언론의 설문 조사에 응하여, 추곡 매입 가격이 생산 가격에 미달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농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식량 증산을 위해서는 비료 판매를 자유화하고 농우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