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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52
한자 釜山國際映畵祭-生活
영어의미역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the life of programmer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어린 시절 해운대의 추억]

부산 국제 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을 만나기 위해 영화의 전당을 찾았다. 미리 전화 통화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기는 하였지만 막상 거대한 건물 안에서 국제 영화제의 실무자들이 일하는 공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십여 분 정도 헤매다가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해서, 그리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기 전에 김지석이 기억하는 부산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로, 추억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제 고향은 부산 해운대입니다, 1960년에 출생을 해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해운대에서 살았어요. 대학을 부산대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장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가 현재는 광안리에 살고 있습니다. 제 부모님도 부산 출신이시네요.

아주 예전의 해운대는 지금처럼 호텔이 많지가 않았어요. 제 어린 시절에는 극동 호텔과 해운대 관광호텔, 두 곳 뿐이었습니다.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그랜드 호텔로 가는 길은 예전에는 하천이었어요. 지금은 복개 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노보텔 호텔이 있는 그 자리는 원래 빈 공터여서 어린 시절 야구를 하며 뛰어 놀기도 하였어요. 조선 비치 호텔은 아예 있지도 않았고요.

당시 해운대 동백섬 안에는 고아원과 넓은 터가 있어서 유치원 시절 그 곳으로 소풍을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해운대의 끄트머리에 있던 웅촌에서는 고기잡이배가 오가고. 영화의 전당이 있던 이곳은 원래 수영 비행장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수영만 요트 경기장이 있는 곳은 원래 바다였어요. 그곳을 매립해서 만든 것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해운대 신시가지 안에는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기에 민간인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제 어린 시절의 풍광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특히 동백섬의 변화가 제일 아쉬운 맘이 드네요. 호텔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분명 예전에는 가난하였지만 지금보다도 인간다운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인심이 있던. 어린 시절에 제가 살던 집에 중국집이 세를 들어 있었습니다. 마침 그 집에 제 또래가 되는 아이가 있어 친하게 지내고 같이 뛰어놀았어요. 명절이면 그 집에서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서 서로 나눠 먹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정을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땐 밖에서 망개떡을 파시는 분들이 참 많았어요. 이른 아침에는 재첩을 팔기 위해 동네를 분주히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들렸고요. 지금은 다 사라졌네요.”

[영화 도시 부산의 거리, 남포동 극장가에서의 추억]

지금의 영화관들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예전의 영화관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옛날의 극장은 흔히 개봉관, 재개봉관, 재재개봉관 등으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인기 있는 영화를 바로 보여 주는 개봉관은 부산에서도 중구 남포동에 거의 밀집해 있었다. 부영 극장, 국도 극장, 제일 극장, 왕자 극장, 대영 시네마, 부산 극장 등 어른들의 추억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이 극장들은 전부 남포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외의 재개봉관이나 2본 동시 상영관 등은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변두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옛날에는 일명 ‘간판장이’가 있어 극장의 외관에 영화 제목과 주인공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기도 하였다. 또한 좌석의 높낮이가 차이가 별로 없어 앞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키가 클 경우 뒷좌석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화면이 가려져 불편하였던 경우도 다반사였다.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에 있던 개봉관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1,000석 규모가 넘는 엄청나게 큰 대형 상영관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특히 학생이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시험이 끝나면 단체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시설이 낡고 노후하였기에 영사 시스템이나 사운드 시스템이 지금보다 수준이 낮은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 시절 딱히 다른 오락거리가 부족하였던 때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주는 비상구와 같은 역할을 대중 영화관이 담당하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주말과 휴일에 시내로 영화를 보러 나가는 나들이는 마치 시골 마을에서 읍내로 장을 보러 가는 것과 유사한 흥과 낭만을 갖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일종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부산과 국제 영화제의 시작]

1996년 9월 13일,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가 개최될 당시만 해도 영화계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동경 국제 영화제가 우리보다 먼저 출발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도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국제 영화제 개최가 가능할 것인지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의 영화인들은 세계 10대 영화제에 부산 국제 영화제를 당연히 포함시키고 있다.

물론 영화제에 랭킹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 이외에 모스크바, 로카르노 등의 영화제와 거의 비슷하게 부산 국제 영화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러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국제 영화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 평론가 이용관[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 집행 위원장·경성대학교 교수]와 김지석[영화 평론가·부산예술대학교 교수], 전양준[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 부집행 위원장] 등이 중심이 되어 칸이나 베니스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당시 부산을 지역적 거점으로 해서 활발하게 평론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의 유명한 영화제 등을 찾아다니면서 영화제에 대한 조사를 조금씩 축적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1995년 무렵부터 국제 영화제 개최를 부산광역시에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황당한 이야기로 듣던 부산광역시에서도 그들의 열기에 감복하고 청사진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김지석 등은 당시 문화부 차관을 거쳐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내었던 김동호를 찾아가 부산 국제 영화제 집행 위원장으로 영입하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우선 영화계에서도 부산 국제 영화제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것도 어려웠고, 작품을 받기는 더욱 어려웠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국의 어디에 있는지 설명부터 해야 하였고, 영화제의 성격이나 방향 등에 대해 수없이 반복해서 이해를 시켜야만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치러진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는 모두 27개국, 170편의 작품이 초청되었다. 그 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지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해 청사진을 그리며 같이 의논하였던 세 사람[김지석, 이용관, 전양준] 모두의 생활 터전이 부산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부산에서의 영화제에 대한 그림을 그렸던 것이지요. 영화와 관련해 부산 지역이 가지고 있던 특징 중에 하나는 평론가들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는 점입니다. 전국에서 최초로 영화 평론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또 『영화 언어』라는 평론지도 발행이 되지요. 그러한 부분들이 부산에서 국제 영화제를 시작할 수 있는 저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다른 지역, 서울과 광주에서도 국제 영화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요. 특히 서울은 충무로가 있었기에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문제는 서로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거지요. 사공이 너무 많았다고 할까요? 그와 비교해서 부산에서는 우선 ‘영화제’에 대한 개념이나 이해가 거의 전무하였고 관심도 낮았지요. 어쩌면 그러한 측면 때문에 일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것과, 영화제를 운영하는 것은 서로 다른 측면이 많은데 서울에서는 영화인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였지요.

또 다른 이유로는 저희들이 해외를 다녀보니까 성공한 영화제들이 그저 단순한 영화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끼고 있어서 ‘영화제’와 ‘휴양지’의 성격을 함께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산은 굉장한 메리트가 있었지요. 해운대, 광안리와 같은 천혜의 해변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휴양과 영화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한 점을 부산광역시의 공무원들에게 강하게 어필을 하였어요.

결국 부산에서 국제 영화제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입니다. 하나는 영화제를 잘 이해하는 전문가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부산이 바다를 끼고 있기에 휴양도시의 성격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지요.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영화제 자체를 이해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간에 당시 사람들은 영화제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어요. 일주일 동안에 영화 수백 편을 상영한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것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같은 쇼와 축제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영화제를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히 부산광역시를 설득하는 점에서 집행 위원장을 맡았던 김동호 위원장의 인간적인 매력과 넓은 인맥이 매우 큰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부산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부산이 ‘문화 불모지’와 같았기에 상대적으로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산 국제 영화제가 그러한 문화에 대한 목마름[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고. 또 거기에 대해서 부산 시민들의 반응도 직접 영화제를 감상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부산의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지지하는 분위기가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그러한 시민의 힘, 관객의 힘이야말로 부산 국제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셈이지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것은 비사에 해당하는데, 1995년에 파라다이스 호텔 측에서 영화제 스폰서에 대한 긍정적인 의향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부산광역시를 설득하기가 쉬웠어요.”

부산광역시에서는 1996년 ‘아시안 위크’라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아시아 지역의 음악, 공연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문화 행사를 한 주 동안 부산 시내 곳곳에서 여는 것이다. 여기에 부산 국제 영화제가 출범하게 되면서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사실 부산광역시에서는 이 국제 영화제를 처음에는 ‘아시안 위크’의 부대 행사 정도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였다. 따라서 부산광역시에서 영화제에 대한 예산 지원도 2억 원에 불과하였다. 국제 영화제를 치루기 위해 필요한 나머지 부족한 예산을 김동호 집행 위원장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채운 것이다.

1996년 수영만 요트 경기장의 야외 상영장에서 국제 영화제 개막작이 상영되었다. 그 자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그 현장에서 다들 놀라워하며 새로운 별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야외 영화 스크린[영화제를 위해서 스위스에서 특별 제작]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신선한 문화 충격, 해외의 수많은 영화인들을 초청하여 벌인 갖가지 행사, 무엇보다 그 이전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해외 영화들과의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영화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사회주의권의 영화는 아예 상영할 수 없었으며, 이웃 나라인 일본의 영화도 역시 수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이 볼 수 있는 영화는 한국·홍콩·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거의 전부였고, 아주 드물게 프랑스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 다였다. 그러한 국내의 영화 현실에서 부산 국제 영화제를 통한 수많은 아시아 영화와의 만남은 분명 새로운 신천지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영화 도시로서의 부산]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가 기대보다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영화제를 바라보는 부산광역시의 인식도 바뀌게 되었다. 부산광역시는 처음의 미온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을 제공하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 집행 위원장이었던 김동호는 오랜 관료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지향적인 태도와 오픈 마인드를 가진 정말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김동호는 영화제 준비부터 진행까지 모든 과정에서 부산광역시의 간섭[외압]을 배제하려 노력하였다.

부산광역시에서도 김동호의 고충과 입장을 이해하고 예산과 행정은 적극 지원하면서도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방 자치 단체와 영화제 측의 상호 이해와 협력은 부산 국제 영화제를 성공의 궤도에 올려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다른 지역에서 하는 영화제의 경우 지방 자치 단체와 영화제 실무자들 사이에 필요 없는 간섭과 참견을 통해 갈등과 알력이 발생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영화제에 대한 지역 언론의 관심과 반응도 매우 중요한데, 부산의 경우에는 지역 언론에서 호의적인 태도로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준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가 비교적 초창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구도심 지역에 밀집해 있던 대형 극장가의 존재였다. 대형 스크린에 좌석이 1,000석이 넘는 대극장이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주변에 밀집해 있었다. 부영 극장·국도 극장·제일 극장·왕자 극장·대영 시네마·부산 극장 등 대형 극장이 모여 있었기에 영화제를 진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물론 이 극장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낡은 건물과 영사기, 영사 시스템, 사운드 시스템의 질적인 수준에서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제 초창기에는 바다인 해운대와 원도심 지역인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으로 이원화해서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해 영화인이나 영화제를 감상하기 위해 멀리서 온 관객들의 항의가 많았다. 그래서 부산 국제 영화제의 중심이 해운대의 센텀으로 이전하게 되었을 때, 중구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소상공인과 영세 사업자들이 많이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제가 해운대를 중심으로 단일화가 된 것은 지역 상권을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영화제를 찾아온 젊은 층의 영화 관람에 집중할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에서 결국 영화제 기간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인데 영화제의 입장에서는 관객의 입장을 가장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그에 따른 영화제의 세계적인 위상을 확립하면서 이제 고민은 ‘영화 축제와 산업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하는 점이었다. 이러한 고민과 노력 끝에 1999년 부산영상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부산영상위원회는 한국에서, 아니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위원회의 역할은 영화 촬영과 제작에 있어 행정적인 지원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충무로와 같은 영화 메카가 있는 서울은 예외로 하더라도 재정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지역에서 영화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인 셈이다.

따라서 부산영상위원회는 철저하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현장을 생각하고, 그 현장에 맞는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 지하철이나 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한다고 할 때 장소 사용의 문제가 당장 나오게 된다. 부산교통공단에 공문으로 촬영 협조를 부탁하고, 영화 촬영에 대한 허가가 나올 때까지 허비하는 시간은 몇 주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제작에 있어서 시간은 곧 경비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학교의 경우에도 상급 행정 기관인 교육인적자원부나 해당 지역의 관할 교육청의 허가와 개별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 등이 발생할 수 있다.

부산영상위원회는 이러한 행정적인 문제 등을 전담하여 처리하는 전문 부서이다. 부산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부산영상위원회의 영향 덕분에 1999년에 국내에서 촬영하는 영화의 40%가 부산에 내려와서 촬영을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지금은 국내에서 10여 곳의 시도에서 이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 영화 촬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화 펀드, 스튜디오, 영화의 후반기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영화 기지 등 영화 산업의 인프라 구축이라는 방향을 향해 느리지만 꾸준히 달려가고 있다. ‘영화 도시 부산’의 꿈은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니라 현실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와 관련해 국내의 정책과 제도 등을 입안하는 영화진흥위원회도 부산으로 이전할 계획이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으로 내려오면 국내의 영화계에 다양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롤 모델은 홍콩 영화제였다. 홍콩 영화제는 이미 30회가 넘은 역사를 가진 영화제로 비경쟁 영화제에 해당된다. 특히 홍콩 영화제는 아시아의 모든 영화제 가운데 가장 유럽에 가까운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부산 국제 영화제 역시 비경쟁 영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산 국제 영화제가 비경쟁 위주에서 경쟁 부문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지석은 부산 국제 영화제가 경쟁으로 가서는 실패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산 국제 영화제가 비경쟁 부문을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경쟁 부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뉴 커런츠’는 경쟁 부분에 해당한다. 다만 칸 영화제의 경쟁과 다른 점은 배우들의 연기나 극본 등 다양한 부분에서 경쟁과 심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상 하나만을 심사하는 차이가 있다. 뉴 커런츠는 사실 완전한 경쟁이라기보다는 아시아 지역의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성격이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비경쟁 부문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의 신인 감독들에게 영화 제작의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측면이 매력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는 ‘필름 마켓’[완성된 영화를 대상으로 함]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마켓’이 있다. 프로젝트 마켓은 완성된 영화가 아닌,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발굴, 지원해 준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으로 젊은 아시아의 영화인들이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아오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전체 예산의 절반은 부산광역시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지석은 부산 국제 영화제가 앞으로 영화 산업이나 부산이라는 지역성 속에서 ‘공익적인[공공적인]’ 역할의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가을 영화제 기간만 반짝 흥행하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지속될 수 있는 영화 산업적인 효과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영화계에서 부산 국제 영화제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아시아 영화 전체의 동반 성장.’ 이것이 가능하게끔 프로모션 할 수 있는 아시아 지역의 영화제가 현재로서는 부산 국제 영화제인 셈이다. 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 동안 아시아 여러 지역의 영화인 30명을 모집해서 ‘아시아 영화 아카데미’라는 워크숍을 3주 동안 진행하고는 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이 상시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외에 부산 지역에 영화 제작사를 유치한다든지, 아시아 영화 공동 제작의 활성화, ‘펀드’를 통한 영화 제작의 지원, 해외 진출과 배급 지원 등이 아시아 영화·문화의 중심 도시로 부산과, 부산 국제 영화제에 바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 국제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생활]

“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사람은 총 일곱 명입니다. 국내의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보자면 많은 숫자인 편이지요. 보통은 삼사 명의 프로그래머가 영화제 준비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캐나다의 토론토 국제 영화제의 경우 프로그래머가 열 명이긴 합니다만,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무조건 많다고 좋은 영화제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고, 프로그래머의 역량을 어떻게 키워 가느냐가 관건이 되겠지요.

저와 같은 경우에는 대학에서 처음부터 영화를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산대학교에는 영화학과가 없었거든요. 대신에 영화에 관한 서클[동아리] 활동을 통해 관심을 키워 갈 수 있었고, 졸업 후 다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가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 이후에 부산에 내려와서 시간 강사를 하다가 마침 부산예술대학교가 생겨나면서 그곳에 교수로 부임이 되었지요.

그런데 1996년부터 부산 국제 영화제가 출범하면서 제가 창립 멤버이면서 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맡았었는데 갈등이 좀 생기더군요. 평균적으로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해외로 출장을 나가는 횟수가 10여 회 정도가 됩니다. 한 번 나갈 때 짧으면 일주일, 칸 영화제와 같은 경우에는 이주일 정도 출장을 다녀와야 하지요. 그러다보니 학교와 학생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또 주변에서도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서 다른 일을 같이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에만 전념을 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예술대학교의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었지요.

지금 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업무는 지역이나 장르를 단위로 해서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아시아 담당·비아시아 담당·한국 담당·회고전 담당·다큐멘터리 영화 담당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저는 영화제 초기부터 아시아 영화를 담당해 왔습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영화제를 할 때 평균 300편 정도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 가운데 100편이 아시아 영화에 해당이 됩니다. 제가 일 년 동안 보는 영화의 편수는 1,100여 편 쯤이 됩니다. 그 가운데서 100여 편의 영화로 좁혀야 하는 것이니까 평소에 주로 하는 일은 계속 영화를 보는 일이 되겠지요. 끊임없이 말입니다. 제 가족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가족일 겁니다.

해외의 영화제마다 영화를 선정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저와 같은 경우에는 일본을 해마다 두 번 이상 방문을 합니다. 제가 일본에 가면, 일본에도 일본 영화의 해외 진출을 돕는 전문 기구가 있습니다. 이 기구를 주로 방문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새로 나온 신작만 따로 모아서 상영을 해 주거나 혹은 DVD를 제공해 줍니다. 낮에는 계속 영화를 보고 또 저녁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지요.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정보도 교류하고, 친분을 쌓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타일이 ‘한국적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지요. 대접을 할 때 꼭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한국에서만 통하는 정서지요. 저와 같은 경우에는 술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이것은 부산 국제 영화제의 국제적인 인지도와도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에 칸이라면 출품할 작품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겠지요. 출품을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을 테니까요. 혹은 담당자가 예를 들어 중국을 방문할 때 관련된 영화인들을 전부 한 곳에 집합을 시킵니다. 그리고 설명을 하지요. 미팅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부산 국제 영화제는 그러한 만큼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역량 있는 신인 작가나 좋은 감독의 작품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영화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제 주변에 누가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직업으로 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우선은 말릴 것입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아직은 국내에서 수요가 너무 적은 편입니다. 매달 월급을 주는 프로그래머 자리가 국내에 얼마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20개의 자리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원봉사처럼 혹은 생활비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영화제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다고 말을 해도 열심히 준비하라는 말을 던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너무 좋고, 정말 죽어도 이 길을 가야겠다고 하는 어떤 사명감이 있는 경우에 할 수 있는 그러한 일이거든요. 제 나이 서른여섯에 부산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일을 시작하였어요. 제 인생의 황금기, 반평생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였던 거지요. 저는 프로그래머로써 후회 없이 삶을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후배들에게 이 길을 가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제 아들 녀석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저와 같은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해외 영화제를 방문하고, 유명한 영화 인사들을 만나는 게 멋있어 보였나 봅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가정하였을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언어적인 능력입니다. 외국의 영화를 감상하고, 또 그들과 대화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적인 능력은 필수인 것이지요. 둘째로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영화의 역사, 영화의 촬영 기법, 영화의 제작과 배급 등 모든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요. 셋째로 인문학적인 소양과 자신만의 영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해당 작품의 영화사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와의 조응이라든지 영화감독의 의도를 잘 이해하려면 세계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의 눈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친화력이 되겠지요. 제작자, 영화감독, 배우, 스태프 등 누구와 만나더라도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화력은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능력입니다. 쉽지는 않겠지요?”

[영화 환경의 다변화]

“지금은 영화의 환경이 굉장히 다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전문적인 영화 주간지나 월간지가 꽤 다양하였지요. 지금은 『씨네 21』만 남아 있어요. 어떤 측면에서는 영화를 진지하게 보려고 하는, 그러한 전문적인 ‘비평’의 흐름은 많이 상실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990년대와 비교해 보자면 그런 변화가 있지요. 오락거리들, 대중 문화가 굉장히 다양화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부산 국제 영화제의 관객에 대한 분석·통계를 보면 중장년층 관객은 늘어나는 반면에 청년층 관객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젊은이들이 누리는 대중 문화가 그만큼 다양화된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고요. 또 영화에 대한 취향도 많이 바뀌지 않았나 싶어요. 부산 국제 영화제가 막 시작되었을 때, 분명 영화제에서만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열기, 뜨거움이 존재하였어요. 요즘은 워낙 인터넷에 많은 정보들이 공유되고 웬만한 영화도 검색해서 볼 수 있기에 굳이 영화제를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착시’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영화제에 참여를 해야만 볼 수 있는 영화, 그리고 제작자와의 대화와 문제의식 공유와 같은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영화제 공적 역할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센텀 시티에 만들어진 영화의 전당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전용관이라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이 건물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 부산 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접점이 생겨날 것을 기대합니다. 평상시에 접하기 힘든 예술·작가 영화의 상영이라든지, 야외 상영관의 오픈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김지석의 이야기처럼 지금 현재의 영화 환경은 매우 다양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의 영화 문화에서 이전과 비교해볼 때 ‘비평’이 과연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1980년대, 1990년대와 비교해 볼 때 전문적인 비평 매체는 분명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 웹의 세계에서, 개인 블로그나 웹진 속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과 비평은 오히려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닐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 혹은 관련 종사자들만이 제대로 알고 비평할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면 오늘날의 영화 비평은 비전문가들도, 아마추어들도 자기 나름의 시각과 언어로 영화 비평과 감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사람들이 이제는 친숙함을 갖기에 굳이 다른 전문가의 비평을 참고하거나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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