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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472
한자 東萊耆英會
영어음역 Dongnae Giyeonghoe
이칭/별칭 기영계,내산기영회,동래기영당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94번길 36-6[수안동 510-1]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재단 법인
설립자 이희보
전화 051-555-3403
설립 시기/일시 1846년연표보기 - 기영계 설립
개칭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기영회에서 내산기영회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내산기영회에서 재단 법인 동래기영회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9년 - 기영회 규약 개정
현 소재지 동래기영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510-1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지역 친목 계 단체.

[설립 목적]

1846년(헌종 12) 3월 동래부에 거주하던 50세 이상의 노인 40명이 동래 학소대(鶴巢臺) 아래 윤언서(尹彦瑞) 집에 모여 기영계(耆英稧)라는 친목 시회(詩會)를 만들었다. 기영계를 만든 사람은 동래부의 퇴임 이서(吏胥)[서리, 이속, 아전 등]인 이임(吏任)과 무임(武任)들이었다. 동래 지역 이임직과 무임직 퇴임자들은 각각 별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한 것이다. 중국 송대 부필(富弼)과 사마온공(司馬溫公) 등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조직하여 시 짓고 술 마시며 즐기던 낙양 고사를 따서 회 이름을 기영계라고 지었다.

[변천]

기영계는 1853년(철종 4)에 입회 자격과 계금 관리 등 여러 규정을 마련하는 조직의 정비를 하였다. 1876년(고종 13)에는 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내산(萊山)기영회’로 이름을 고쳤다. 1883년(고종 20)과 1897년(광무 1)에는 동래 부사가 모임에 가입하였다. 동래 부사가 가입함으로써 기영회는 동래 지역의 대표적인 모임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899년(광무 3)에는 기영회 규약을 개정하였다. 1963년 재단 법인 동래기영회가 발족되어, 이희보(李熙黼)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70년 동래유치원을 인수하였다. 1985년 동래문화회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는 송공단·임진 동래 의총을 비롯하여 거사단(去思壇)·영보단(永報壇)·관황묘(關皇廟) 등의 각종 제사를 담당하였다. 기영회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교육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 개항기 동래 지역의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한 점이다. 부산에는 1895년 최초의 근대 학교인 개성학교가 설립된 이후 동래 지역에도 각종 학교가 설립되었다.

1898년(광무 2) 기영회 회원 신명록(辛明錄) 등이 동래군 한문소학교[동래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904년 개양학교에 흡수되었다. 1906년 기영회 회원과 주민이 삼락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 기영회가 삼락학교개양학교를 흡수하여 새로 사립동래동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현재 동래고등학교로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국채 보상 운동의 일환으로 동래 지역에서는 1907년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國債補償一心會)’가 설립되었다. 정한정(鄭漢禎)·송상종(宋商宗)·이상흔(李相昕)·신명록 등 기영회 회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세기부터 동래부에서 지내 오던 향사(享祀)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폐지되었다가 1930년부터 동래기영회에서 매년 송공단, 칠총제(七塚祭), 거사단, 관황묘, 영보단 향사를 인수하여 집행하였다. 식민지 권력의 억압 때문에 향사를 지낼 수 없었던 것을 1930년대부터 기영회가 수행하게 된 것은 지역 사회 내에서 기영회의 위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1970~1980년대 이후 향사의 주체가 바뀌었다. 송공단 의례는 동래기영회가 주최하되, 동래시장번영회가 주관하여 진행하였다. 임진동래의총 제향은 1974년 임진의총이 금강 공원으로 이전되면서 80년대 중엽까지 민간인이 주도하다가, 지금은 동래구가 주최하고 동래문화원 의총제향회가 주관하고 있다. 관황묘 제향은 60년대부터 일부 마을 주민이 지내다가 다시 동래경로당에서 향사를 이어 오다가 2011년에 폐지되었다. 동래기영회 건물 입구 대문에는 중앙에 ‘기영당’이란 현판과 함께 그 양쪽에 ‘재단법인 동래기영회’, ‘동래송공단향사계’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황]

동래기영회 회원 구성이 동래 토박이 기영회 후손 외에 다른 지역 출신들도 가입하고 있다. 인원수도 줄고, 연령이 노령화하는 추세이다. 장관청, 문화회관, 동래유치원 등을 소유하면서 각종 장학 사업, 사회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2007년 이후 동래교육지원청에 결식아동을 위한 급식비를 지원하는 등 사회 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동래구청, 동래교육지원청, 동래문화원,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동래고등학교 동창회 등 기관, 단체와 일정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현재도 약 170년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기영회는 이서 직임 중 요임을 거친 사람과 상급 무임직을 역임한 자가 주축이 되어 조직되었다. 기영회 조직은 무임 집단의 경제적 안정에 기여하여 무임과 이서, 두 집단이 상호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그 후 근대 이행기에 두 집단의 사회적 진출에 도움이 되었다. 기영회 조직은 현재까지 알려진 현존하는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계 조직으로 부산 지역의 인적 네트워크를 비롯한 사회사, 지역사 등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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