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97
한자 利涉橋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the Isep-gyo Bridg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86-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재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35년 3월연표보기 - 이섭교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0년 6월 23일연표보기 - 이섭교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이섭교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현 소재지 금강 공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86-2지도보기
원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86-2
성격 비|기념비
관련인물 이희룡(李喜龍)|김진한(金振漢)|신만재(辛萬齋)
재질 화강암
크기 237㎝[높이]|110㎝[너비]|28㎝[두께]
소유자 부산광역시청
관리자 부산광역시 동래구청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 있는 조선 후기 온천천 이섭교의 완공을 기념하여 세운 비.

[건립 경위]

이섭교비(利涉橋碑)는 1635년(인조 13) 3월 이섭교를 세운 후 동래부사 이희룡(李喜龍)이 인근 7개 면의 보조를 받아, 이 과정에 참여한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섭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서 연제구 연산1동으로 오갈 때 건너는 온천천(溫泉川)에 건설한 다리로, 세 개의 아치 모양의 홍예(虹霓)[무지개]를 연결한 돌다리이었다. 이 돌다리를 설치하기 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으나 나무가 쉽게 부식되어 그때마다 새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불편이 많아 돌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위치]

이섭교비는 원래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 낙민치안센터 인근 온천천 변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와 함께 금강 공원 내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뒤쪽으로 옮겨져 보존되다가,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 회복,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관리를 위해 2012년 원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형태]

비는 개석(蓋石)[비석 윗부분에 얹는 지붕돌]이 없이 머리 부분이 반달꼴로 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237㎝, 너비 110㎝, 두께 28㎝로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내주축성비와 더불어 부산 지역의 기념비 가운데 가장 큰 것에 속한다.

[금석문]

비에는 다리 건설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성명, 그리고 건설에 협력한 각 면의 계(契)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의하면 당시 동래부사 이희룡이 동면 10계, 서면 6계, 북면 8계, 남촌 9계, 동평면 13계, 사천면 9계, 읍내면 14계 등 모두 69계로부터 보조를 받아 세웠다고 한다.

비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물이 깊으면 그냥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고 건너는 것을 사람들 모두가 힘들어 하였으니 이것이 이 다리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나무판으로 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썩어 버렸다. 그래서 해마다 예전 방법을 써서 고쳐 만들었으니 실로 백성들에게는 큰 병폐가 되었다. 일찍이 이 다리를 넓히는 역사를 하는 것이 다 옳다고 하였으나 생각만 있었지 시행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갑술(甲戌)년[1634, 인조 12] 겨울에 부(府) 안의 몇 사람이 개연(慨然)히 앞사람들의 뜻을 이어 화주(化主)를 불러 모으고 재물을 모금하니 돌을 옮기는 부역은 주민들이 스스로 달려와서 다음 해 봄에 그 일을 마쳤다.

이는 실로 지난날에 하려다 끝내지 못한 뜻을 뒤에 와서 하루도 안 되어 완공한 것이다. 김진한(金振漢)이 이 일을 시작하고 신만재(辛萬齋)가 이 일을 완성한 사람이다. 이른바 강물이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고 나루가 넘쳐도 수레바퀴는 젖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다리에 오르는 자는 의당 그 공을 찬미하고 칭송할 것이며 천억 년이 지나도 길이 감사의 말이 있을 것이다[深厲淺揭人皆病涉則此橋之所以作也 然以板爲橋易致朽腐 故逐年因舊貫 改作實爲民弊病矣 曾在廣梯之役 欲刱曰 是也 有意未就 甲戌冬 府中數三人 慨然追前之志 招集化禪 募緣財力 運石之役 民自來趍 翌年春訖其功 此實踵前將營未畢志而成後 不日成功之矣 豈非金振漢始基之 而辛萬齋成之者乎 所謂江流而石不轉 濟盈而不濡軌 則登玆橋者 亦當嘆美而頌功永有辭於千億矣].”

뒷면에는 “유학 김진해 기서, 부사 이공, 좌수 신만재, 별감 문승창·이명노, 대시주 장차선·강희망·정만종, 가선 홍인한·장길사, 통정 김수정, 가선 이개불·김건이동·정특봉·박시성·이영직·장차수·최구가금·노유문, 통정 김옥득·김만세·□□명, 사과 백지원·백응종·백업중·백□지·정충좌·문계영·백태석·신분남·승문인·강치가·박이적·송시웅, 도□수 □□□·박정□, 부□수 김세원·백□·경영·만돌이·해청·김권남·진휘·응주·응묵·김벽순, 화주 □□·□□·□□·□□, 공양 □□·□□·보□·공언·공민·연화·청은·설청·성념·택림·민해·영조·각헌·전형·공담·단준·운혜·김처익. 숭정 후 을해년[1635] 3월 일, 별좌 승 상유[幼學 金振海 記書 府使 李公 座首 辛萬齋 別監 文承昌 李命老 大施主 張次善 姜希望 丁萬宗 嘉善 洪仁漢 張吉士 通政 金守貞 嘉善 李介弗 金件里同 鄭特蜂 朴是成 李永直 張次水 崔區加金 盧有文 通政 金玉得 金萬世 □□明 司果 白之元 白應宗 白業仲 白□之 鄭忠坐 文戒榮 白太石 申分男 僧文印 姜致可 朴以迪 宋時雄 都□手 □□□ 朴整□ 副□手 金世元 白□ 景靈 萬乭伊 海淸 金拳男 眞輝 應宙 應黙 金碧純 化主 □□ □□ □□ □□ 供養 □□ □□ 普□ 空彦 空敏 緣化 淸隱 雪淸 省念 擇林 敏海 英照 覺軒 典形 空湛 壇俊 雲惠 金處益 崇禎 後 乙亥 季春 日 別坐釋尙裕]”라고 되어 있다.

[현황]

1980년 6월 23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12년 원래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섭교비는 다리 건설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성명, 그리고 건설에 협력한 각 면의 계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조선 후기 향토사 및 사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