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985
한자 東萊南門碑
영어의미역 Nammun Stone Monument in Dongnae
이칭/별칭 동래 충렬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대연동 948-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정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1709년 - 충렬사 별사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736년 - 충렬사 별사에서 동래성 남문 자리로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688년연표보기 -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연표보기 - 동래남문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동래남문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지도보기
원소재지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
성격 비|기념비
양식 금석문
관련인물 정발(鄭撥)|송상현(宋象賢)|조영규(趙英珪)|송봉수(宋鳳壽)|김희수(金希壽)|송백(宋伯)|노개방(盧盖邦)|문덕겸(文德謙)|양통한(梁通漢)|김상(金祥)|민정중(閔鼎重)|송시열(宋時烈)|송길준(宋浚吉)|이정영(李正英)
재질 화강암
크기 비신: 250㎝[높이], 122㎝[너비], 20㎝[두께]|이수: 160㎝[높이], 100㎝[너비], 40㎝[두께]|좌대: 190㎝[높이], 100㎝[너비], 50㎝[두께]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의 충렬을 기려 세운 비.

[개설]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순절한 사람들의 충렬을 기려 당시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비로, ‘동래 충렬비’라고도 한다. 비문에는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렬하게 싸우다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를 비롯하여 비장 송봉수(宋鳳壽)·김희수(金希壽)의 순국 충절을 소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향리 송백(宋伯)·교수 노개방(盧盖邦)·유생 문덕겸(文德謙)·양통한(梁通漢)과 주민 김상(金祥)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군·관·민이 전투에 참여하여 순국한 내용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1658년(효종 9) 민정중(閔鼎重)이 동래부사에 부임한 뒤부터 1670년(현종 11)에 비를 세우기까지의 임진왜란 때 활약한 동래부민의 활약상을 찾아 기록하고, 비석을 세운 경위를 기록하였다. 비문은 1668년(현종 9)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건립 경위]

동래남문비는 1670년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장렬하게 싸운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여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웠다. 1688년(숙종 14) 부사 이덕성(李德成)이 중건하였다.

[위치]

동래남문비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처음 세웠다. 1709년(숙종 35) 부사 권이진(權以鎭)충렬사에 별사(別祠)를 세울 때 별사 앞뜰로 옮겼으며, 1736년(영조 12) 별사가 없어지자 동래성 남문 자리로 옮겼다. 1976년 시가지 도로 확장 공사로 현재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번지이다.

[형태]

비신의 크기는 높이 250㎝, 너비 122㎝, 두께 20㎝이고, 이수(螭首)의 크기는 높이 160㎝, 너비 100㎝, 두께 40㎝, 좌대의 크기는 높이 190㎝, 너비 100㎝, 두께 50㎝이다. 현재 비는 받침돌 위에 크게 훼손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이다. 비신 위에 얹었던 머릿돌은 옆에 따로 놓여 있다. 비두석(碑頭石)에는 쌍룡을 조각하였으며, 받침돌은 없어졌다. 비두석의 이수 조각은 우아한 수법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종(神宗) 황제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 4월 13일에 왜적(倭賊) 수십만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부산 첨사 정발 공은 전함(戰艦) 3척으로 바다에 내려가 저항하여 싸웠으나 잠깐 사이에 적선(賊船)이 바다를 뒤덮었다. 공은 한편 싸우면서 퇴각하여 성으로 들어가 방어 준비를 하고, 한편으로 장님으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면서 평일처럼 태연하게 처신하니 군사와 백성이 화평하여 놀라지 않았다. 14일 새벽 적이 성에 다가오자 공은 사기를 올리며 성을 순시하니 사졸(士卒)들이 용맹을 떨쳐서 활을 쏘아 적을 무수히 맞추어 죽이니 세 곳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정오 무렵 공이 홀연 탄환에 맞아 절명하니 성은 그대로 함락되었다. 첩 애향(愛香)은 나이 열여덟으로 또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적은 내쳐 곧바로 동래성을 부수러 갔다. 병사(兵使) 이각(李珏)은 적이 많은 것을 보고는 별장(別將)과 더불어 성문을 열고 도망가 버렸다. 부사 송상현 공은 부임한지 오래지 않았지만 남문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군사와 주민을 거느리고 적을 막았다. 적은 취병장(聚兵場)에 진을 치고 먼저 나무판자에다 글을 써서 성문 밖에 세우게 하였는데,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내어 달라[戰則戰 不戰則假我道]’고 하였다. 공 역시 나무판자에다 글을 써서 적에게 던져 이르기를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 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고 하였다. 적은 이에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15일 아침 적은 성의 뒷산으로부터 성을 깨고 들어왔다. 공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조복(朝服)을 찾아오게 하여 갑옷 위에 꿰어 입었다. 왜적 중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자는 공이 일찍이 잘 대접한 자이었다. 급히 공에게 다가와서 눈짓으로 피하게 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또 옷을 끌어 빈틈 있는 구멍을 가리켰으나 공은 이미 호상에서 내려와 북향하여 절을 하였다. 절을 마치자 서찰을 써서 부친에게 영결하고는 수하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내 허리 아래 점으로 나를 알아보라’고 하였다.

공의 비장(裨將)인 송봉수와 김희수 등 네댓 사람과 향리 송백 등이 힘써 싸우다가 모두 죽자 공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공의 첩인 금섬(金蟾)은 함흥 기생이었다. 공이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죽고자 담을 넘어 달려가다가 사로잡혔는데 사흘 동안 끊임없이 적을 꾸짖으니 적이 마침내 죽였다.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는 모친이 있었다. 공이 다그쳐서 돌아가게 하였더니 도중에 일이 급박하게 되었음을 듣고는 되돌아와서 공과 더불어 죽었다. 교수 노개방은 마침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밀양에서 급히 돌아왔는데, 향교(鄕校)에서는 선성(先聖)의 위판(位版)을 이미 성안의 정원루(靖遠樓)에 옮겨 놓았기에 성문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공이 의롭게 여겨 성안에 들이니, 곧장 위판 앞에 가서 예를 행하고 그대로 시립(侍立)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다가, 유생인 문덕겸·양통한과 함께 죽었다. 그의 처 또한 밀양 땅에서 적을 만나자 남편의 홍패(紅牌)를 품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동래부의 주민인 김상은 기와집에 올라가서 적을 쳤는데, 두 명의 마을 여자가 함께 기와를 뜯어서 거들었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모친이 가서 보았더니 김상은 두 여자와 함께 서로 베고 죽었는데 왜적 셋의 시신 또한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이에 동래부의 소리(小吏) 송백과 관노 철수(鐵守)와 매동(邁同)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북산 밤 숲에 파묻었는데 왜적이 그 상을 거들어 제문을 지어 제사하고, 금섬 또한 같이 묻고는, 그런 다음 적중에 공을 해친 자를 끌어내어 죽였다. 이로부터 남문 위에는 항상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 있으면서 수년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갑오년에 조정에서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적장(賊將)에게 말을 하고 그 집사람으로 하여금 적진 중에 들어가서 공의 영구를 모시고 돌아왔는데, 적장이 그 행렬을 만나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산의 전투에서는 흑의장군(黑衣將軍)이 가장 두려웠다. 만약 성이 견고하고 병력이 많았다면 끝까지 성을 깰 수 없었으리라’고 하였다. 대개 정공(鄭公)이 검은 옷을 입었던 것이다.

그 뒤 67년 숭정 무술년[1658]에 민정중 공이 동래부사가 되어 당시 사정을 캐물었는데, 그때 노인 중에 아직 남아 있는 이가 있었다. 그가 울며 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캐어 장차 그 사적을 싣고 또 집을 세워 그림으로 그려 이각이 도망가던 꼴을 아울러 드러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권하고 징계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려 하였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풍성(風聲)을 수립하고 백성의 바른 마음을 일깨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며 금성탕지(金城湯池)의 견고함도 또한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민공의 직책이 바뀌어 가니 동래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지금 주상 무신년[1668]에 이지익(李之翼) 공이 민공이 기록한 바 글 한 통을 서찰과 함께 보내와서 이르기를, ‘민공이 하려던 일을 이제 뒤따라 완성하려 하니 청컨대 글을 지어 상세히 기록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그 글을 수정하여 주었다. 이에 앞서 윤훤(尹暄) 공이 부사가 되어서 송공(宋公)의 묘(廟)를 세우고 정공을 배식(配食)하였는데 사액(賜額)을 충렬사라 하였다. 그 뒤 윤문거 공이 내산(萊山) 아래 안락(安樂) 언덕으로 옮겨 건립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노 교수도 아울러 철향(腏享)을 하리라고 한다.

시열(時烈)이 기왕에 이 비문을 서술하고 나서 이어서 들으니 양산 군수 조영규의 절의(節義) 또한 탁월하다 한다. 그 가승(家乘)에 이르기를 공은 변고를 듣고는 동래성으로 가서 13일에 송공에게 고하고 군(郡)으로 돌아가서는 모친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때는 사사로운 정을 돌볼 수 없다’고 하고는 아들 정로(廷老)에게 군사를 피할 방법을 부탁하고, 곧장 말을 달려 되돌아왔는데 성이 이미 다급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성으로 들어가서 송공과 더불어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성이 함락되자 반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었다. 이제 경상도 관찰사 민시중 공이 보여 준 공첩(公牒)과 동래부에서 얻은 기록을 보니 가승과 부합한다.

그러므로 이를 기록하여 동래부사 정석(鄭晳) 공에게 부탁하여 추가하게 한다. 공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효성으로 임금을 감동시켜 연신(筵臣) 송준길의 말에 따라 특별히 그 절의를 포상하여 정려(旌閭)를 내렸다. 또 장성(長城)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제사한다. 정로는 차마 적과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토실(土室) 하나를 지어서 구멍을 막고는 나오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한다. ‘시열이 이 비문을 이미 서술하고’ 이하의 글은 다른 단락으로 하여야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송시열 기록함.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 찬선 송준길 씀.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 이정영 전서. 강희(康熙) 경술(庚戌, 1670)년 세움.

[神宗皇帝萬曆壬辰四月十三日 倭賊數十萬犯境 釜山僉使鄭侯撥 以戰艦三艘 下海拒戰 俄頃之間 賊船蔽海 侯且戰且退 入城治守禦具 且令瞽吹簫 晏閒如平日 軍民和靜不驚 十四日曉 賊薄城 侯厲氣巡城 士卒奮踴射殪賊無數 賊三處積尸如山 日午 侯忽中丸絶 城遂陷 妾愛香年十八 亦自剄死 賊仍擣東萊城 兵使李珏見賊盛 與其別將開門遁去 府使宋公象賢莅職未久 上南門樓 率軍民以禦賊 賊軍于聚兵場 先遣木板書立城外曰 戰則戰 不戰則假我道 公亦書木板投賊曰 死易假道難 賊遂圍之三匝 十五日朝 賊自城後山破城入 公據胡床 索 朝衣穿甲上 有賊平調益者 公曾款接之 急趨公目之使避 公不應 又牽衣指隙竇 則公已下床北向拜矣 拜訖 修書訣其父 謂其下曰 汝以吾腹下痣驗我 公裨將宋鳳壽, 金希壽等四五人及鄕吏宋伯等力鬪皆死 公遂遇害 公妾金蟾 咸興妓也 欲就公倂命 踰垣走被執 罵賊三日不絶口 賊遂殺之 傔人申汝櫓有母 公迫令歸 中路聞事急還 與公同死 敎授盧蓋邦適寧親密陽 急歸鄕校 則先聖位板 已移城中靜遠樓矣 叩城門大哭 公義而納之 則遂詣位板前行禮 仍侍立不少離 與諸生文德謙, 梁通漢同死 其 妻亦遇賊於密陽 懷其夫紅牌 投崖死 府民金祥乘瓦屋擊賊 有二村女同乘撤瓦以助之 賊去 祥母往視 則祥與二女相枕死 而三賊亦橫尸其側矣 於是府吏小宋伯, 官奴鐵壽, 邁仝收公尸 瘞於北山栗林 賊助其喪 爲文以祭之 亦以蟾同瘞之 遂引賊之害公者戮之 自是南門上 常有紫氣亘天 數年不滅 甲午 朝廷令帥臣言于賊將 而使其家人入賊中 舁公柩以還 賊將遇之 下馬致敬焉 又謂釜山之戰 黑衣將軍最可畏 若城固兵多 終不可破 蓋鄭侯穿黑衣也 後六十七年崇禎戊戌 閔侯鼎重爲東萊府使 訪問當時事 其老人尙有遺在者 其涕泣言如此 遂伐石將載其事 又將立屋圖畫之 並著李珏遁走之狀 使人有勸懲之心 則其所以樹風聲而裨民彝者不少 而金湯之固 亦無以踰焉 然事未就而閔侯遞去 府人咸惜之 今上戊申 李侯之翼以閔侯所錄一通 幷以書來曰 閔侯之事 今欲踵而成之 請爲文詳記之 遂就加檃括以遺之 先是尹公暄爲府使 爲立宋公廟 而鄭侯配食 賜額曰忠烈 後尹公文擧移建於萊山下安樂原 士民並將以盧敎授醊享云

時烈旣述此碑 續聞梁山郡守趙侯英珪其節亦 卓卓 其家乘云 侯聞變赴萊城 十三日 告宋公歸郡 泣辭其母曰 此時不可顧私 託其子廷老以避兵策 旋卽馳還 則城圍已急矣 侯衝突入城 與宋公誓與同死 城陷 不離頃步而死 今見嶺伯閔公蓍重所示公牒及所得於萊府者 與家乘相符 故錄之 託萊府伯鄭公晳追刻焉 侯性至孝 有孝感 今上朝 用筵臣宋浚吉言 特旌其節 又長城人立祠以祀之 廷老自以不忍與賊戴天 作一土室 塞竇不出而死云

時烈旣述此碑 以下當作別段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宋時烈記 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世子贊善 宋浚吉書 嘉善大夫漢城府右尹 李正英篆 庚戌 六月 日立].”

[현황]

현재 석면이 모두 떨어져 나가 글씨를 볼 수 없다. 다행히 석면이 온전할 때 탁본한 것이 남아 있다[대구방(大邱坊) 소장, 고탁본 목록]. 1972년 6년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래남문비를 통해 임진왜란 때 부산을 지키다가 순절한 인물들과 그 일을 기리기 위한 동래 부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26 내용 수정 송길준->송준길로 수정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