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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청룡암 시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399
한자 梵魚寺靑龍巖詩石
영어의미역 Monument at Cheongryongam at Beomeosa Temple
이칭/별칭 범어사 청룡암 바위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비
관련인물 이안눌
소유자 범어사
관리자 범어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9년 9월 3일 - 이안눌 청룡암 시 목판,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5호로 지정
현 소재지 범어사 청룡암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이안눌(李安訥)의 시를 새긴 바위.

[개설]

범어사 청룡암에 새겨져 있는 이안눌[1571~1637]의 시는 2수이다. 「청룡암 시(靑龍巖詩)」와 「범어사 증도원산인(梵魚寺贈道元山人)」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악집(東岳集)』에 실려 있는 제목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청룡암 시」로 불리는 시는 ‘혜정 장로가 시 한 수를 지어 돌 위에 새겨 놓고 후일에 볼거리로 삼자고 청하므로 문득 이렇게 써서 보여 드리다’라는 뜻의 「혜정장로 청부일시 참제석상 이위후일지람 첩서차이시(惠晶長老 請賦一詩 劖諸石上 以爲後日之覽 輒書此以示)」라는 다소 긴 제목이다. 그리고 「범어사 증도원산인」으로 알려진 시는 『동악집』에 「범어사 증도원상인(梵魚寺贈道元上人)」으로 되어 있다.

이안눌은 1609년 5월 중순 범어사에 머물면서 여러 스님을 위해 시를 지었는데, 도원 스님에게 지어 준 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들 시의 제목은 혜정 스님을 ‘장로’라고 칭한 것 외에는 모두 ‘범어사 증◯◯상인’의 형식이다. 이때 이안눌이 시를 지어 준 스님들은 혜정 장로(惠晶長老), 묘전 상인(妙全上人), 지안 상인(智安上人), 도원 상인(道元上人) 등이다. 이 중 이안눌이 혜정 스님에게 준 시를 목판에 새긴 이안눌 청룡암 시 목판(李安訥靑龍巖詩木版)은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홍주 목사로 있던 이안눌이 동래 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한 것은 1608년(선조 41) 2월 15일이다. 홍주를 출발한 것이 1월 29일이니 보름이 걸린 셈이다. 1609년(광해군 1) 5월 초에 병으로 파직되었으나 후임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동래의 관사에 머물러 있다가 6월 초순이 지난 뒤에는 더위를 피해 범어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이안눌이 머무른 곳이 혜정 스님의 처소이다.

이안눌범어사를 오가기도 하고 거처를 옮겨 40여 일을 머물기도 하면서 26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혜정 스님에게 지어 준 시가 5수이다. 이른바 「청룡암 시」도 그 중 하나이다. 이렇듯이 「청룡암 시」는 지어질 때부터 혜정 스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안눌은 혜정 스님이 당귀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하여 시를 짓기도 하고, 밥을 차려 준다고 시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으며, 전별 후에 신발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위치]

범어사 청룡암 시석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범어사의 산령각 앞, 지장전과 나한전 사이에 있는 바위 청룡암이다.

[형태]

범어사 청룡암은 범어사 산령각 앞, 지장전과 나한전 사이에 남북으로 길쭉하게 앉은 형태이며, 이안눌의 시는 바위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에 새겨져 있다. 범어사에서 실측한 범어사 배치도를 통해 보더라도, 청룡암은 위쪽의 3칸짜리 산령각의 지붕 높이의 두 배 이상 될 정도로 거대한 바위이다.

[현황]

이안눌의 시 2수는 이안눌범어사에 머물었던 1609년에 청룡암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룡암 시」를 별도로 새긴 목판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 시가 당시부터 지역민의 애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청룡암 시석이안눌의 『내산록(萊山錄)』에 포함된 시 가운데 2수가 새겨져 있다. 이안눌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한국 한시사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였다. 그 목릉성세의 최고봉에 이르렀던 이안눌이 바위에 새길 것을 전제로 지은 시가 곧 「청룡암 시」이니 그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 더구나 동래에 부임하였던 수많은 목민관 중에 임기 중에 임지의 이름을 내세워 별도의 시고(詩藁)를 남긴 이는 이안눌이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루어진 『내산록』의 시 가운데 2수가 새겨져 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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