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60
한자 潁陽千氏旌閭閣
영어의미역 Building Erected for Honoring the Virtue of Yeongyang Cheon
이칭/별칭 오효자 정려각(五孝子旌閭閣)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산7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영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각
양식 기와 맞배지붕
정면칸수 2칸
측면칸수 1칸
소유자 영양 천씨 석대 문중
관리자 영양 천씨 석대 문중
건립 시기/일시 1960년 3월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88년 4월 - 현재 위치인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으로 이전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8년 4월연표보기 - 중건
현 소재지 영양 천씨 정려각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산73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영양 천씨 가문의 효자 다섯 명과 효부 한 명의 정려각.

[개설]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온 천만리(千萬里)의 4세손 천찬석(千贊鉐)이 처음 입향한 이후부터 해운대 석대 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해운대구 석대동영양 천씨 가문은 효자·효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석대동 상리 마을에는 영양 천씨 정려각(潁陽千氏旌閭閣)이 있어 효자 마을로 이름이 높다. 영양 천씨 가문의 효자 다섯 명은 석대 입향조(入鄕祖) 천찬석의 6세손 천성태(千聖泰)[1725~1789], 천성태의 아들 천세모(千世慕)[1743~1810], 천세모의 아들 천술운(千述運)[1767~1835], 천술운의 아들 천상련(千相璉)[1795~?], 천상련의 아들 천우형(千禹炯)[1843~1886]이며, 효부 한 명은 천우형의 처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이들 효자들은 부모 섬기기를 지극히 하여 부모가 병에 걸리면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힘써 구원하였고, 부모 별세 후에는 3년간 시묘(侍墓)하며 상례(喪禮)의 애통함을 다하였다. 효자들이 부모 묘소에서 시묘할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호위해 주었고, 묘소 부근에서 샘물이 솟아나 시묘의 불편을 덜어 주었는데, 시묘가 끝나면 호랑이도 가 버리고 ‘효자천’이라 불리는 샘도 말라 버렸다고 한다. 또 효부 김해 김씨는 선대의 묘소 위에 지방의 토호(土豪)가 몰래 묘를 쓰자, 즉시 달려가 무덤을 파헤치고 관가(官家)에 자수한 뒤 형벌을 받았다.

[위치]

영양 천씨 정려각해운대구 석대동 상리 마을에 위치한다. 해운대구 석대동에서 회동 수원지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수원지 가까운 곳에 자리한다.

[변천]

1752년(영조 28)부터 오대 육효의 효행에 대해 100여 회에 걸친 지역 사림(士林)의 천거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정려를 받지 못하였지만, 1919년 오륜행실중간소(五倫行實重刊所) 명의로 『포창 완의문(褒彰完議文)』이 발급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곧바로 정려각을 건립하지 못하고, 1960년 3월 영양 천씨 석대 문중에 의하여 비로소 완공되었다. 이후 도로 공사와 석산 공사로 인해 일시 철거되었다가 1988년 4월 독지가의 발의로 현재의 위치에 중건되었다.

[형태]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기와 맞배지붕 건물로, 정려각 안에 6기의 석비가 일렬로 안치되어 있다. 정려각 바로 앞에 안내판이 존재한다.

[현황]

현재 영양 천씨 정려각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이다.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매년 양력 5월 5일 영양 천씨 정려각에서 제향을 올려 조상의 효행을 추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을 대표하는 정려인들을 알 수 있는 영양 천씨 정려각은 지역사 복원과 지역민의 긍지를 키울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