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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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碩崇旌閭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Honoring the Virtue of Gim Seoksung |
이칭/별칭 | 효자고사인김석숭지려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대로 1465[죽림동 74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심민정,진상원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있는 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김석숭(金碩崇)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정려(旌閭)란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그의 집 앞이나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다. 김석숭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도 출생으로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여 1829년(순조 29)에 정려되었다.
[건립 경위]
김석숭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시묘를 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집에 빈소를 차려 놓고 모시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병들어 눕자 변을 직접 맛보아 병세를 헤아렸는데, 마침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어머니께 드려 7일을 더 연명할 수 있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묘를 하였다.
무덤 가까이에 우물이 없어 불편하였는데, 무덤 곁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이를 마시고 생활할 수 있었다. 삼년간의 시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에 불이 나 온 마을이 다 타 버렸지만, 그의 집만 온전하게 남았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화재를 피하였다고 하였다.
김석숭이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40여 년 만에 사림이 상소를 올려 1829년에 정려되고 김석숭 정려비(金碩崇旌閭碑)가 건립되었다.
[위치]
김석숭 정려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740번지 죽림파출소 근처에 있다. 본래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해창 큰길 옆에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가락공립보통학교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이후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파출소장이 매일 밤 김석숭 정려비의 이설로 인한 현몽에 시달려 지금의 죽림파출소 앞으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형태]
쇠창살로 된 정문을 중심으로 높이 75㎝의 기와 담장이 둘러 있고 담장 안의 정문 양쪽에 자그마한 문인상(文人像)이 세워져 있다. 담장 안의 주 건물로 돌기둥 두 개가 양쪽에서 기와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이고 있다. 돌기둥의 윗부분 안쪽에 가로로 끼워 놓은 직사각형 석판(石板)이 현판의 기능을 하면서 두 돌기둥의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그리고 현판 아래에 깨져 아랫부분만 남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 그 앞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평평한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상석 위에는 원래 가로 25㎝, 세로 21㎝, 높이 46㎝ 크기의 석상이 서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석상 정면에는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는 7자 2행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도 판독이 불가능한 9자 18행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울타리 담장은 가로 261㎝, 세로 240㎝, 높이 75㎝, 비신(碑身)은 높이 46㎝, 너비 24㎝, 두께 20㎝, 옥개석은 가로 120㎝, 세로 94㎝, 높이 40㎝, 비석 양쪽의 돌기둥은 높이 85㎝, 너비 18㎝, 두께 41㎝, 돌기둥의 윗부분에 붙은 돌판은 길이 62㎝, 높이 28㎝, 두께 10㎝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효자 고 사인 김석숭지려(孝子故士人金碩崇之閭)’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공은 본관이 김해 사람이다. 본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어머니가 극구 만류하여 여막(廬幕)을 지어 시묘하지 못하고, 대신 빈소를 예법대로 지켰다. 어머니가 병들자 변을 맛보아 차도를 살폈으며, 병이 깊어져 돌아가시려 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켜 7일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다.
장례를 치르고 시묘하였는데, 샘물이 감응하고 호랑이가 감화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을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바람이 역으로 부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그가 죽은 뒤 40여 년 만에 사림의 상소로 그 사실이 보고되어 정려가 내렸다.
공은 61세를 살았다. 밀양 박씨를 배필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용기·김용삼·김용관이다. 둘째는 후사가 없고 막내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따라 묘소의 여막에서 지냈는데, 호랑이가 그의 ……를 핥아 주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관례(冠禮)도 못하고 죽었다. 손자가 있는데 김옥돈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조상 받드는 일을 몸소 다하였다. 사람들이 효손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주상[순조] 재위 29년 기축년[1829] 정려비를 세우다[公金海人也 性孝事親至誠 父歿 母固止不得廬墓 而侍殯如禮 母病 嘗糞驗差 劇垂死 斷指注血 甦延七日 克葬侍墓 有泉感虎化之異 喪畢還家 有里火 反風之祥 歿後四十餘年 因士林之疏 事聞旌閭 壽六十一 配密陽朴氏 三子曰龍起龍三龍寬 仲無后 季九歲 隨父在墓廬 有虎舐之事 而未冠夭 有孫曰玉敦 幼喪祖父及父 及成 以身克奉先事 人稱孝孫云 上之二十九年己丑 立閭]”라고 적혀 있다.
[현황]
길옆 주택가 담장 아래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고 있다. 김해김씨 가락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석숭 정려비는 예전에는 김해 지역이던 부산광역시 강서구의 의미 있는 지역 인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동시에 정려비의 비문이 잘 남아 있어 당시 유림이 올린 소의 문구 유형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