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곡서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994
한자 川谷書院
영어공식명칭 Cheongok Neo-Confucian Academy
이칭/별칭 성주 천곡서원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소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 영봉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천곡서원 훼철[서원 철폐령]
개축|증축 시기/일시 1602년 - 천곡서원 중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천곡서원 사액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천곡서원 재사액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 영봉서원에서 천곡서원으로 개칭
현 소재지 천곡서원 터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지도보기
원소재지 영봉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성격 서원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던 조선 전기 서원.

[위치]

천곡서원(川谷書院)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영봉산 기슭 옛 사원 터에 있었다.

[변천]

천곡서원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1454~1504],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558년(명종 13)에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던 노경린(盧慶麟)[1516~1568]을 중심으로 지방 사림(士林)이 건의하여 서원을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영봉서원(迎鳳書院)이라고 하였는데 여론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자 정구(鄭逑)[1543~1620]가 중심이 되어 『삼국지(三國志)』의 와룡 고사(臥龍故事)를 인용하며, ‘이천(伊川)’이 정이(程頤)를, ‘운곡(雲谷)’이 주희(朱熹)를 봉안한 땅의 이름과 같으므로 도학의 연원에 따라 김굉필만을 종향(從享)하겠다고 하였고, 서원의 이름도 주변을 흐르는 이천의 ‘천(川)’과 지역 이름인 운곡의 ‘곡(谷)’을 따서 천곡서원이라고 1568년(선조 1)에 개칭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였으며, 1606년(선조 39)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1623년(인조 1)에 정구를, 1642년(인조 20)에 장현광(張顯光)[1554~1637]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형태]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에 따르면 천곡서원의 규모는 50여 칸이었다. 강당인 성정당(誠正堂), 동재 극복재(克復齋)와 서재 경의재(敬義齋)를 갖추었으며, 고명루(高明樓)와 풍영대(風詠臺)가 있었다. 서원 동쪽에는 사묘(祠廟)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천곡서원은 성주군 지역에 최초로 건립되었던 서원이다.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인 이황이 시와 기문을 짓고 『영봉지(迎鳳地)』 편찬 문제 등에 개입하였을 뿐 아니라, 영남 유학의 중심 인물인 정구와 장현광 역시 천곡서원의 중건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천곡서원은 처음에 이조년(李兆年)[1269~1343], 이인복(李仁復)[1308~1374], 김굉필을 제향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이후 정구가 와룡의 고사를 인용하여 정자와 주자를 배향할 것을 제안하였고, 서원 이름을 천곡서원으로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천곡서원은 정자와 주자를 주향으로 하여 김굉필만을 배향하게 되었으며, 이후 정구와 장현광도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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