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봉서원 제향 논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09
한자 迎鳳書院祭享論難
영어공식명칭 Yeongbong-seowon Jehyang Nonran|Controversy over the Ancestral Rite of Yeongbong-seow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60년연표보기 - 영봉서원 제향 논란 발생, 이조년과 이인복이 배불한 인물이므로 제향에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됨
종결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 영봉서원 제향 논란 종결, 제향 인물은 김굉필로 하고 천곡서원으로 명칭 변경. 이조년과 이인복은 충현사에서 제향
발단 시기/일시 1558년 - 영봉서원 제향 논란, 이문건이 선조 이조년과 이인복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 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560년 - 영봉서원 제향 논란, 이조년·이인복·김굉필을 함께 배향하는 안이 나오다가 김굉필만 제향하는 안이 나오는 등 여러 의견이 제시됨
발생|시작 장소 영봉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천곡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문건|노경린|이이|이황|이조년|이인복|김굉필

[정의]

1560년 전후로 성주의 영봉서원 건립 과정에서 제향 인물의 결정을 놓고 벌인 논란.

[개설]

영봉서원 제향 논란은 1558년(명종 13) 성주 최초의 서원인 영봉서원의 건립 과정에서 제향 인물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처음에는 이조년(李兆年)[1269~1343]과 이인복(李仁復)[1308~1374]을 제향하려 했지만, 결국 당시에 확산되고 있던 도학(道學)의 영향으로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제향하였다. 이조년이인복은 별도로 세운 충현사(忠賢祠)에 제향하였다.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성주 지역은 고려 시대부터 지역 토착 세력이 강력한 곳이었고, 조선 건국 때부터 사림이 뿌리를 내려 조선 왕조에서 도학의 정착과 확산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던 곳이다.

[경과]

노경린(盧慶鱗)[1516~1568]이 성주에 목사로 부임하자, 성주에 귀양 와 있던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1558년 서원 건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향현으로 지목된 인물들은 바로 이문건의 선조인 이조년, 이인복 등이었다. 이문건성주 이씨(星州李氏) 이조년의 후손으로 조선 개국공신 이직(李稷)[1362~1431]의 직계손이었다. 서원 건립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노경린이 안동의 이황(李滉)[1501~1570]에게 두 인물에 대한 향사를 포함해서 서원 건립에 관한 여러 사항들을 자문했고, 이황도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노경린은 1558년(명종 13) 8월에 향교 석전례를 마치고 영봉산(迎鳳山) 기슭 지장사(智藏寺) 터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가을에 시작하여 겨울에 재목을 모아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인 1559년 여름에 승려들의 손을 빌려 기와를 굽고 가을에 서원을 완공하여 편액을 ‘영봉서원’이라 했으며, 1560년 봄에는 단청(丹靑)을 하였다.

그때 이론이 제기되었다. 노경린의 사위 이이(李珥)[1536~1584] 등 신진들이 이조년 영정에 염주가 들려져 있음을 지적하며 배불(拜佛)한 인물을 서원에 제향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논란이 일면서 처가 고향인 성주에 자주 출입했던 김굉필이 향현 인물로 거론되었고, 이조년, 이인복, 김굉필을 함께 제향하기로 하였다. 이어 이황에게 영봉서원의 기문을 부탁했고, 이황은 이조년·이인복의 충절과 김굉필의 도학을 동시에 찬양하는 기문을 지었다.

그러나 이황이 「영봉서원기」까지 썼지만, 제향 인물 위차 문제를 놓고 또 다른 논란이 발생하였다. 연대를 우선할 것인가, 도학을 우선할 것인가를 놓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노경린과 성주 이씨들은 나이를 우선하여 3인 제향을 주장했고, 신진 사류들은 김굉필의 도학을 강조하였다. 이에 노경린이 이황에게 편지로 이 문제를 문의하자, 이황은 위차 문제에 앞서 이조년·이인복과 김굉필을 함께 향사하는데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황의 입장은 충절인은 향현사(鄕賢祠)에 제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존 견해를 수정하여 도학을 보다 강조한 것이었다. 노경린이 다시 편지를 보내 중국의 서원 제향자 사례를 들어 3인을 함께 향사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며, 도학자와 비도학자(非道學者)를 함께 제향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퇴계(退溪)는 답변서에다 서원에서 제향하는 인물은 도학자 위주여야 한다는 견해를 명백히 하였다. 다만 영봉서원 문제에 국한시켜 볼 때, 김굉필이 덕행은 비록 높다고 하지만 저술이 없어 후세에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반드시 도통의 적전(嫡傳)으로 추숭되는 데는 자신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갓 후대의 도학 이름만으로 전대의 충현(忠賢)을 배향(配享)하게 하는 것은 상황이나 논리로 보아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봉서원의 위차에 대해 김굉필을 상좌(上座)에 두고, 이조년·이인복을 남향하게 하며, 김굉필과 이조년·이인복 위좌(位座) 사이를 병풍으로 막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이런 해결책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논란은 결국 송사로 이어져 영남 일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결과]

영봉서원 제향 논란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새로 입향하고 김굉필만을 배향하는 것으로, 1568년(선조 1)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서원 명칭도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개명하였다. 정구(鄭逑)가 이황에게 자문하여 성주에 있는 이천(伊川)과 운곡(雲谷)의 지명 한 자씩을 따서 천곡(川谷)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이천은 정이(程頤)[1033~1107]의 호이고, 운곡은 주희(朱熹)[1130~1200]의 호이다. 성주 이씨는 별도로 충현사를 세워 이조년, 이인복의 위패를 옮겨갔다.

[의의와 평가]

영봉서원 제향 논란은 16세기 중반 성주 지역에서 도학이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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