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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비롯해 인천 지역에서 벌어진 시민운동. 2000년 4·13 총선을 맞아 전국 412개 시민 사회 단체들은 총선 시민 연대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낙선, 낙천 운동에 나섰다. 인천에서도 시민 사회 단체들로 관련 연대 기구가 구성되어 낙천, 낙선 대상자를 발표하였으며 인천광역시 남구의 출마 후보자도 이에 해당하였다. 1999년 시민 단체들은 국회의원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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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6일부터 시작된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 운행. 서울과 인천 간 버스 운행 코스는 서울에서는 영등포(永登浦)를 출발하여 오류동(梧柳洞), 구로리(九老里)[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를 거쳐 부천의 소사(素砂), 명치정(明治町), 인천의 부평, 주안, 경전 창고(京電倉庫)를 지나 송판정(松坂町)까지이다. 버스 운행 자체는 최초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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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일에 인천광역시 지역의 시민 단체들이 수원 지방 법원에 낸 경인 고속 도로 통행료 부과 처분 취소 청구 소송.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이 시점인 경인 고속 도로 통행료 징수에 대한 반대 운동은 1997년 5월 12일 한국 도로 공사가 통행료를 800원에서 1,000원으로 기습 인상하자 1997년 5월 23일 인천 YMCA와 인천 사랑 여성 모임이 이에 반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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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위치한 인천 지역 최초의 민영 방송국인 극동 방송국의 건물. 극동 방송국은 인천 최초의 민영 라디오 방송국으로, 1954년 7월 동맹 선교회가 당시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허가를 받고 1956년 12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588에 설립하였다. 1957년 1월부터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명칭은 국제 복음 방송국으로 주로 선교를 목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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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로 이송된 김구가 1898년 탈옥한 사건.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김구(金九)[1876~1949]가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타살했다. ‘치하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날의 사건은 김구가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목적으로 명성 황후를 살해한 일본인, 혹은 범행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왜구(倭寇)’ 한 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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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김구 주석 애도 행사. 1949년 7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의 영결식에 맞추어 당일 오후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당시 인천부 도원동]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을 애도한 집회이다. 김구(金九)[1876~ 1949]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이유는 김구와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전개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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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었던 인천 교육 대학교[현 경인 교육 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민속학자. 김순제는 인천 교육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뱃노래와 우리 민요 연구에 헌신한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적은 황해도 서흥군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김순제(金順濟)[1922~2010]는 1922년 4월 28일 황해도 개풍군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 송도 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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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수봉 공원에 소재하고 있는 인천의 초대 민선 시장 김정렬(金正烈)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기념비(紀念碑). 인천의 초대 직선제 민선 시장으로 당선되었던 김정렬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 성격의 기념비로 1996년 5월 5일 인천광역시 의정회(仁川廣域市議政會)와 지방 행정 동우회 인천광역시 지회 등이 공동 발의하여 건립한 것이다. 김정렬은 1907년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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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하 공업 전문 대학 내에 있는 국토 높이 측정 시설물. 수준 원점이란 우리나라의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평균 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하여 육지에 설치해 놓은 시설물이다. 측량법에 따라 우리나라 국토의 높이는 대한민국 수준 원점을 기준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 수준 원점은 인천만의 평균 해면상으로부터 26.6871m이다. 1914년부터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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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19일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인천 지부 주최로 개최된 신탁 통치안 반대 집회.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이승만이 1945년 10월 23일 결성한 독촉 중앙 협의회를 모체로 하여 결성된 전국적 규모의 우익 연합 단체로 1946년 2월 8일 조직되었다.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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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동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 1910년 경술국치라 일컫는 한일 병합 조약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19년 3·1 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학생 주도의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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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일본인 이와사키 히사야가 창업한 농원. 1915년에 발간된 『인천 향토 사료 조사 사항(仁川鄕土史料調査事項)』에 따르면 일본인 대부호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는 당시 인천부 다소면 용현정동[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인천 출장소를 설치하고 1908년 7월, 6만 원을 투자하여 동산 농원을 창업하였다. 본점은 도쿄시 본고우쿠 유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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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공장이 세워진 방직 회사. 인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직 공장이었던 동양 방직(東洋紡織)은 1930년대 초에 세워졌으며, 일본에 본사를 두고 경성의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공장을 두었다. 광복이 되고 나서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가 1948년에 동양 방적 공사로 바뀌었다. 이때 공장장인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귀속된 적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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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동양 제철 화학 공장에서 배출된 폐석회의 처리 문제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일어난 사회 운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공장이 위치한 동양 제철 화학은 자사의 폐석회 야적장 인근 공유 수면 매립지에 대한 아파트 건설 사업 승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320만 톤에 달하는 폐석회 처리가 환경 문제로 불거지면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아파트 건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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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과 도화동 일대에 있었던 농원. 동일 농원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에 걸쳐 있었던 농원이다. 운영한 사람은 김주하로, 주로 배를 재배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와 주변 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과수원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수원들로는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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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문학산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할 계획을 철회시키기 위한 시민운동. 1998년 12월 4일에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봉재산 방공포 부대에서 나이키 미사일 한 발이 오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미사일이 자폭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시민들의 방공포 부대에 대한 우려는 커졌고 부대 이전에 대한 요구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봉재산에서의 미사일 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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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27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가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한 집회. 좌익 계열의 ‘민족 통일 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가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을 촉진한다는 취지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한 집회이다. 미국과 영국, 소련의 3개국 외상은 1945년 12월 16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3개국 외상 회의를 열고 그 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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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아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념 축하행사. 미국 독립 기념일은 미국의 공휴일 가운데 비종교적인 것으로는 가장 성대한 기념일이다. 대륙 회의가 독립 결의안을 실질적으로 승인한 것은 7월 2일이고, 독립 선언문이 공식 발표된 것은 7월 8일이었지만 독립 선언문의 초안이 만들어진 것은 7월 4일이었다. 독립 선언 제1주년 축하 행사는 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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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 시민 회관 앞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 민주당의 개헌 추진 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 대회를 앞두고 재야, 노동자, 학생, 시민 등이 민주 헌법 쟁취와 독재 타도, 노동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86년 상반기 신한민주당의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이 전국적인 지지를 넓혀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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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친일파 관료.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평재(平齋)이고, 참정 박홍수(朴洪壽)의 아들이다. 박제순(朴齊純)[1858~1916]은 1858년(철종 9)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여, 1885년(고종 22) 정시(庭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 병과(丙科) 3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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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이 속했던 행정 구역 명칭.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일제는 종전까지 군(郡)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던 지방 행정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 행정력이 지방 하부 단위까지 미칠 수 있도록 면(面) 중심의 지방 행정 체제 개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10년 「조선 총독부 지방관 관제」와 「면에 관한 규정」을 공포해 면을 최하급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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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학생과 일반인 등이 참가해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민주주의 혁명. 4·19 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 선거에 맞서 1960년 4월, 학생들이 주도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는 인천 공업 고등학교, 인천 사범 학교, 인하 대학교 학생 등이 시위에 앞장서며 인천 지역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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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해방 후 첫 3·1절을 맞아 인천시 도원동에 있는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념식. 해방 후 인천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3·1절 기념행사는 당초 좌·우익 정당 간에 연락이 없이 각자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3·1절 행사를 통해서라도 좌·우익 양측이 일치단결하여 치르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아 1946년 2월 20일 인천시 경동 한국 민주당 인천시 지부에서 3·1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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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7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거족적인 민족 운동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는 이보경, 이무경, 오주선, 최선택, 이창범, 이재경, 이상태, 최개성 등이 주동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6일, 지금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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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부의 부윤(府尹)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부여 현감을 역임한 서명순(徐明淳)의 아들로 서기순(徐冀淳)에게 입양되었다. 서상교(徐相喬)[1838~?]는 1838년(헌종 4) 출생하여 1886년(고종 23) 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현대식 학교인 육영 공원(育英公院)이 설치되자 주사(主事)로 있다가 그 뒤 내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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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한 선인 학원이 학내 분규를 겪어 오다가 1994년 3월 1일 시·공립화된 사건. 1981년 선인 학원 설립자인 백인엽이 부정 편·입학 등과 관련해 구속된 이후 학내 분규가 끊이지 않다가 1994년 인천 대학교를 비롯한 선인 학원 산하 학교들이 시립화 또는 공립화되어 새로 출범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한 선인 학원은 백인엽이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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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있는 인하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국문학자.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호는 수여(水余)이다. 성낙원(成樂元)의 손자이며, 아버지 성필경(成必慶)과 어머니 권정임(權丁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기열(成耆說)[1929~1991]은 1955년 서울 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졸업 후 1956년 민중 서관에 입사하여 이희승 감수의 『국어 대사전』의 기획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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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수봉 근린공원 일부가 토지 사기꾼에게 넘어갔다가 환원된 사건. 수봉 근린공원 내의 약 19,954㎡[6천여 평]에 이르는 땅은 본래 1939년 일본인 하야시 쇼조[林省三]의 명의로 돼 있었는데, 1948년 한미 협정에 따라 국유 재산이 되었다. 그러나 1967년 토지 사기꾼이 매매 계약서를 위조해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 다른 사람들에게 되판 사건이 발생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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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노선 중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및 주변 지역 구간의 지하화를 요구한 시민운동. 인천광역시와 수원시 사이 52.8㎞를 잇는 복선 전철인 수인선에 대해 인천광역시 남구·연수구 등 지역 주민들은 소음과 분진 등을 이유로 지하화를 요구하였다. 공사 계획 초부터 이어진 지역 주민들의 지하화 요구는 서명 운동과 지하화 추진 단체 설립으로 이어졌다. 원래 수인선은 1937년 개통된 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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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 내의 홈 플러스 입점을 반대하며 진행된 시민운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소재 숭의 운동장이 철거되며 숭의 운동장 일대 도시 재생 사업이 시작된 후, 이곳에 새로 들어설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 내에 대형 마트인 홈 플러스가 입점할 계획이 발표되자 주변 재래시장 상인들이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2011년 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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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미국이 조선에 침범함으로써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무력 침략한 사건이다. 주청 전권 공사 F. F. 로우(F. F. Law)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J. Rodgers)는 군함 5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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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24명이 탈출하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를 지나간 사건. 북한의 ‘1·21 사태’가 발생한 후 정부는 대북 대응 조처 방침에 따라 1968년 4월 1일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실미도 부대를 창설한 후 공작원을 모집해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에서 3년 4개월간 훈련을 진행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24명이 기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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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던, 개항기 미국인 호러스 알렌의 별장 터.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한 미국의 외교관이자 선교사이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알렌은 인천에 자주 들렀어야 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러기에 인천에 별장을 건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 별장은 1893년 건립되었으며, 지상 2층의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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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5일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인천 소재 22개 초등학교들의 연합 운동회. 6·25 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인천시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시내 22개 초등학교가 참여하는 대운동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의 명예 회장에는 인천 시장, 회장에는 조석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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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이며, 자는 윤익(允翼), 호는 범재(凡齋), 시호는 숙민(肅敏)이다. 아버지는 엄석풍(嚴錫豊), 할아버지는 엄저(嚴著), 증조할아버지는 엄사건(嚴思健)이며, 외할아버지는 이원달(李源達)이다. 엄세영(嚴世永)[1831~1900]은 1864년(고종 1)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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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부터 1993년까지 110년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비롯한 인천광역시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한 책. 미추홀에 연원을 두고 있는 인천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특히 개항 이후 인천은 인천항을 중심으로 많은 선각자들이 개화의 꿈과 열정을 안고 해외를 왕래했던 개화의 관문이며, 일제 강점기에 광복을 염원했던 애국지사들의 숨결이 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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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형성된 성매매 집결지. 옐로우 하우스는 1960년대부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360번지 일대에 형성되어 왔다. 인천 개항 후인 1902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신흥 시장 일대에 들어선 부도 유곽(敷島遊廓)이 전신이다. 부도 유곽은 광복 후에도 옐로우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계속 이어지다가 1961년 5·16 군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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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었던 경인 교육 대학교의 본관 건물. 경인 교육 대학교는 해방 이후 새롭게 제정된 교육법에 따라 초등 교원의 양성을 목적으로 1946년 5월 23일 경기도 개성시에 경기 도립 개성 사범 학교가 설립 인가되면서 개교한 학교이다. 같은 해 9월 1일부로 개교하여 경기도의 초등 교원을 양성하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2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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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을 비롯한 인천광역시 지역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1985년 2·12 총선 이후 전개된 직선제 개헌 운동의 열풍을 타고 신한 민주당이 1986년 5월 3일 당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소재 인천 시민 회관에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보수 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반발한 재야 세력 및 학생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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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시작되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도 대학생 등이 참여하게 된 민주화 운동. 1979년 10월 26일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태’가 발생하였다. 10․26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이 12․12 사건을 일으키며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민주화 운동 세력과 정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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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4동에 있던 양조장. 와룡 양조장이라는 말보다 흔히 양조장, 혹은 양조장 저수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와룡 양조장은 인천 일대에서 유통되던 와룡 소주를 생산하였던 곳이다. 와룡 양조장이 위치하였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4동 일대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대부분 논밭이나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와룡이라고 적힌 와룡 양조장 굴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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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수원을 연결하는 협궤 철도인 수인선의 용현역이 있던 자리. 수인선은 1937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경기도 수원을 연결하는 협궤 철도였던 수여선을 인천까지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궤 철도이다. 수인선은 수원에서 인천까지 총 52㎞의 구간에 17개의 정류장을 설치하였다. 당시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인천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40분이었으며 17개의 정류장 중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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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부터 1987년 6월 29일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전역에서 전개된 민주화 시위. 1987년 6월 10일부터 1987년 6월 29일까지 계속된 6·10 민주 항쟁은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구호로 외치며 전개된 민주 항쟁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소재 인하 대학교 학생 등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민과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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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8일 서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50년 7월 3일 밤 경인 가도 등을 통해 인천 지역으로 진격하여 인천 지역의 각 기관을 점거하였다. 1973년 7월 3일 밤부터 7월 4일까지 인천 지역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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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안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무신. 윤협(尹脥)은 1855년(철종 6) 동해안에 표착한 미국 상선 투 브라더스(Two Brothers) 호의 선원들이 역관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자 정부에 의해 이종원(李鍾元)과 함께 파견되어 필담으로 소통을 하였다. 윤협은 1864년(고종1) 경흥 부사로 재임 시 러시아 인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통상 요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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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후부터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에서 남하하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비롯한 인천광역시 전역에 정착해 거주하는 북한 출신 주민들.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인천 지역에는 북한으로부터 많은 주민이 남하하여 정착해 왔다. 특히 인천 지역에는 황해도에서 이주한 정착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인천광역시에 거주하는 이북 오도민의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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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과 1906년에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 개간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발생한 분쟁. 일본인 마츠다 코조[松田行藏]이 1905년 2월 한국인 이희열의 명의를 빌려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에 대한 개간 특허권을 획득한 후,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에게 양도하려 하였다. 한국 정부가 개간 특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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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해안 도로에 위치한 인천 상륙 작전 상륙 지점 표지석.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로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상륙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 폭격이 9월 4일부터 15일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해병대 항공기는 9월 10일에 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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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인천 출신 전몰장병 379위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국군 묘지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한 사건. 현재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인천 출신 전몰장병들은 몇 차례 이장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해광사(海光寺)에 안치되어 있다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국군 묘지로, 다시 서울특별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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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통치를 강압적으로 행사하던 시기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역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도의 위치·관할 구역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 구역」 변경에 따라 새로 신설된 부천군 다주면과 부천군 문학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용현동·도화동·주안동이 부천군 다주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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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 및 일행을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던 인천부 청사로 도망치게 만든 사건.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7월 23일에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 급료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난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와 그 일행은 난을 피해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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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수봉 공원 내에 있는 전적 기념 구조물.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 전역에 거주하던 재일 한인 청년 학생 총 642명이 스스로 재일 학도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재일 학도 의용군은 불과 1주일 정도의 훈련을 거친 후 참전하였고, 백마 고지 전투 등 주요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재일 학도 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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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인천 소재 적산 공장에서 소유·관리권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각종 분쟁. 적산(敵産) 혹은 귀속 재산은 해방 때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갖고 있었던 기업체, 부동산, 유·무형의 동산과 주식 및 지분 등을 말하는 것으로, 1941년 말 현재 일본인 회사의 자본 비중이 91%나 될 정도로 조선 경제는 압도적으로 일본 자본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적산 공장은 원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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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31일 반탁 학생 총 연맹을 비롯한 15개 학생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우익 학생 운동 단체 전국 학생 총 연맹의 인천 지역 지부. 전국 학생 총 연맹은 1946년 7월 31일 발족하여 1949년 12월 29일 해체된 우익 학생 운동 단체이다. 전국 학생 총 연맹은 1946년 7월 12일 반탁 학생 총 연맹을 비롯한 13개 학생 단체와 28개교 대표 138명이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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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인천부 주최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행사.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역사적인 날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지 38년 만에 마침내 우리 정부를 갖게 된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중앙청 광장에는 주둔지 일본에서 건너 온 맥아더 미 태평양 전구 사령관 내외,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 딘 군정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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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무신. 정지용(鄭志鎔)[?~1882]의 가계와 출생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880년(고종 17)부터 1882년(고종 19)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설치되었던 인천도호부에서 부사를 역임하였다. 정지용은 1873년(고종 10)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여 1875년(고종 12) 울산부에서 발생한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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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5일 결성된 조선 공산당 산하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의 인천 지역 조직.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는 해방 당시 분산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조직을 산업별로 조직화·체계화하고 전국 단위에서 통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려는 목적 하에 설립되었다.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 인천 지구 위원회는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의 인천 지역 조직으로 인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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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부 주안면 십정리,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에 있었던 천일 시험 염전 터. 기후 및 지리적으로 천일염 생산이 어려웠던 일본은 조선이 천일제염(天日製鹽)을 시행하기 좋은 지형과 지질, 기후 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1906년 대장성(大藏省)[재정, 통화, 금융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일본의 행정 기관]의 오우기시[奧技師]를 초빙하여 천일제염의 시험 장소를 물색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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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던, 개항 이후 인천에 들어와 거주했던 중국인들의 묘지 터. 의장지(義莊地)라고 불렸던 청국인 묘지는 1884년 3월 7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한 인천구 화상지계 장정 조약(仁川口華商地界章程條約)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약의 내용에는 청국인의 거주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이 조항에는 “제물포와 10여 리 떨어진 지역 이내에 청국 상인들이 마음대로 좋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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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했던 옛 숭의동 운동장의 관리인. 최승환은 1934년 웃터골 운동장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으로 이전될 때 토목 공사장의 인부로 고용되어, 운동장 건립 후 관리인으로 일하였다. 최승환은 속칭 ‘운동장 최 씨’로 불렸다. 최승환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최 씨의 아들 최중달은 아버지의 일을 대물림하여 숭의동 운동장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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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7일에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인하 대학교 학생을 포함한 투숙객들이 사망한 사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있는 인하 대학교 학내 동아리 아이디어 뱅크 회원들인 대학생 35명이 강원도 춘천시 상천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 뱅크 발명 캠프를 진행하던 중, 2011년 7월 27일 새벽, 숙소인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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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인 1906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가 창업한 농원. 평산 농원(平山農園)은 창업자인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히라야마 마츠다로가 1906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해당하는 인천부 다소면 비룡리에 투자액 2만 6500원으로 창업한 농원이며 복숭아, 포도, 사과, 배, 앵두, 감, 밤, 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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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서 출토된 임오군란 당시 주한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행의 탈출을 기념하는 비.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주한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 1917]는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하나 공사 일행 조난지비는 탈출하기 전 인천도호부 관아에 잠시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34년경 발견지 부근에 세워졌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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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때 인천을 개항 지역으로 선정한 일본의 정치가 겸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오카야마[岡山)] 현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해외 유학을 떠나 프랑스·영국·미국을 거쳐 1868년 귀국하였다. 1871년 9월 조선 대리 공사로 부임하였고, 1880년 변리 공사가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하나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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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가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에 머물다가 병사들에게 습격당한 사건. 1882년 7월 19일 훈련도감(訓練都監) 군인들이 난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고 일본공사관을 포위·공격한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3개월이나 밀렸던 급료로 받은 쌀이 정량이 아닌데다가 대개는 물에 잠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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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위치하였던 집창촌. 집창촌이란 다수의 성매매 업소가 집결한 곳으로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전까지는 서울특별시의 청량리, 미아리, 용산역 부근 등을 비롯해 전국의 주요 집창촌은 성매매가 인정되는 공간으로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인식되었다. 인천광역시의 경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414번지 일대가 속칭 ‘끽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인천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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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위치한 경인 철도 1차 기공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개통된 경인 철도는 개통 당시 인천역과 노량진역 사이의 31.5㎞ 구간에 인천역, 축현역, 우각리역, 부평역, 소사역, 오류역, 노량진역 등 7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항 이후 인천항에 입항한 외국인들은 서울로 가려면 우마차 등의 육로를 이용하거나 수로를 이용해야만 했는데, 반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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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18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던 시민 운동회. 1946년 8월 18일 해방 1주년을 맞아 인천시 체육회와 인천 육상 경기 구락부 공동 주최로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당시 인천부 도원동]에 소재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해방 1주년 기념 경축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열린 해방 1주년 기념 경축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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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역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인천부 남동 출장소, 인천부 문학 출장소, 인천부 주안 출장소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1956년 11월 23일에 인천시 남부 출장소, 인천시 남동 출장소, 인천시 문학 출장소, 인천시 주안 출장소 관할로 다시 분할되었고, 1968년 1월 1일에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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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수봉 공원의 현충탑에서 현충일에 거행되는 의식.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소재 수봉 공원의 현충탑에서 거행되는 애국선열과 무명 용사들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의식이다. 제(祭)는 유교식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하지만 재(齋)는 불교적 의식으로 공양을 차별 없이 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단 법인 범패와 작법무 보존회가 2003년에 6월 6일 처음 봉행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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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수봉 공원에 있는 전몰 용사 추모탑. 1953년 7월 23일 6·25 전쟁 휴전 직후, 당시 재향 군인회 인천 지부[지부장 김택병]에서는 6·25 전쟁과 공비 토벌 작전 중에 인천 지역에서 전사한 전몰 용사 신현홍 중령 등 504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3년 11월 14일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충혼탑은 최초에는 만국 공원[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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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별장을 지었던 미국 외교관 및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1881년 웨슬리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의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1년간 활동하다가 1884년 9월 인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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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안장되었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초명은 면희(冕熹), 호는 만호(晩湖)·만오(晩悟)이다.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남숙희(南叔熙)의 딸 남상복(南相福)을 아내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홍기택(洪起澤)을 두었다. 홍진(洪震)[1877~1946]은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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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있었던 인천의 독립운동가 홍진(洪震)의 묘비. 홍진 묘표라고도 한다. 만오(晩悟) 홍진[1877~1946]은 충청북도 영동군 태생으로 대한제국 시절 한성 평리원 검사, 충청 검찰청 검사를 역임하고 3·1 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법무 총장, 내무 총장, 의정원 의장,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또한 1928년 김구(金九)[1876~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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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설치되었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화장장. 1887년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묘지가 인천광역시 중구 율목동에 처음 세워졌으나, 시신의 화장을 위한 화장장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 때문에 율목동 서쪽 해변에서 관을 눕혀 화장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이 매우 컸었다고 한다. 일본 거류민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1888년 일본 영사관에서는 지금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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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25일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6·25 전쟁 휴전 방침에 반대하여 거행된 인천 시민 궐기 대회. 6·25 전쟁이 3년째에 접어들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연합 참전국들 사이에는 더 이상 한국에서 희생을 치를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져 갔다. 공산권도 승리 없는 전쟁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휴전 회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사망으로 인해 휴전 논의는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