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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동 성덕마을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61
한자 長德洞成德-堂山祭
이칭/별칭 장덕동 성덕마을 동제,장덕동 성덕마을 도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부유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70년대 - 장덕동 성덕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 성덕마을지도보기
의례 장소 천룡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 성덕마을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신당/신체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천룡당산[느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덕동 성덕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장덕동 성덕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성덕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천룡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성덕마을은 1760년경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이주와 정착으로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이후부터 지냈던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에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성덕마을의 당산은 2곳이 있었는데, 마을 앞의 할아버지당산과 마을 뒤의 천룡당산이다. 할아버지당산은 농지 정리 때 원풍정과 함께 없어졌으며, 천룡당산은 1976년 구획 정리 때 없어졌다고 한다. 신체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당산나무를 가져다가 집에서 불을 피우면 큰일난다'는 마을의 영험담으로 보아, 느티나무로 추정되고 있다.

[절차]

장덕동 성덕마을 당산제는 정월 10일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축관, 헌관을 선출한다. 이들은 선정된 날부터 3개월간 궂은 곳의 출입을 삼가야 하며, 개고기를 먹지 않는 등 금기사항이 많았다. 특히 제일(祭日)까지 찬물로 목욕을 하고, 용변 후에도 목욕재계를 해야 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다. 제비(祭費)는 가족 구성원마다 쌀로 거출하였는데, 임신 중인 어린이도 해당되었다. 거두어진 쌀을 팔아 제물(祭費)을 구입하고 나머지는 깨끗한 쌀로 교환하여 떡과 메를 지었다. 제물로는 새끼돼지, 삼실과, 삼채 등을 구입하는데, 이때 값을 깎지 않는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여 제사가 끝나면 화주가 소유한다. 제일 이틀 전에 마을 입구, 당산 주변, 화주집 등에 금줄을 치고, 제일 아침 일찍 금줄이 쳐진 곳에 금토를 놓아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제일 오후부터 화주집에서 화주 부부가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데, 이때 서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음식 맛도 보지 않는다.

정월 열나흗날 초저녁이 되면 농악대가 굿을 치면서 마을을 도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제일임을 알리고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다.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대나무로 사다리를 만들고 베로 감아 들 것으로 사용하였다. 천룡당산에는 제관과 농악대만 참석을 하고, 여성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제사는 유교식으로 치러진다. 소지는 화주가 먼저 한 후 축관, 헌관, 상쇠 등의 순으로 한다. 헌식은 돼지머리와 진설된 음식을 조금씩 백지에 싸서 당산 옆에 묻는다. 음복은 간단히 한다. 돼지의 몸통은 삼우날에 제관들만 먹었는데, 다른 사람이 먹으면 입이 부르튼다고 한다.

[축문]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 문안은 확인할 수가 없다.

[현황]

장덕동 성덕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행하여졌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에 마을회의에서 폐지하기로 결정하여 중단되었다.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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