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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09
한자 龍淵洞龍淵-堂山祭
이칭/별칭 용연동 용연마을 동제,용연동 용소마을 당산제,용연동 용소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86년 이후 -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별신제단 -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 뒷산 중턱지도보기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윗당산] -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 입구지도보기
의례 장소 할머니당산[아랫당산] -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 입구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신당/신체 별신제단[흙무덤]|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할머니당산[은행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 용연마을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년,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용연마을 사람들이 지냈던 마을 제의로, 별신제단과 두 당산에서 정월 열나흗날 밤에 모셨다. 1980년대에 도심지로 사람들이 이주해 나가고 굿을 칠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중단되었다.

[연원 및 변천]

용연동 용연마을제2수원지 아랫마을로 무등산(1,187m) 남서쪽 계곡 깊은 곳에 있다. 용이 승천한 연못이 있다고 전해져 용솟골, 용문굴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 마을은 과거부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1986년까지 당산제를 모시다가 상쇠 박현채가 작고한 뒤 마을 사람들이 점차 도심지로 이동하고 굿을 칠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당산제는 사라졌다고 한다.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는 1993년에 용소당산제라는 이름으로, 기우제는 1985년에 무등산기우제라는 이름으로 남도문화제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용연마을의 당산은 모두 세 곳으로 마을 뒷산 중턱의 별신제단과 마을 입구의 윗당산, 아랫당산이 있었다. 별신제단의 터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그곳에 묘처럼 흙무덤을 만들어 그 밑에 진설을 하고, 그 꼭대기에 헌식을 하였다. 윗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라고 하는데, 마을 입구 논가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이다. 아랫당산은 윗당산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할머니당산이라고 한다. 본래 아랫당산도 느티나무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베어내고 그 옆 입석 또한 개울로 넘어뜨려 버렸다. 1987년 조사 당시까지 입석은 개울에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이후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어 아랫당산으로 삼았다. 윗당산 느티나무도 일본인들이 함께 베어가려고 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이 저항하고 협상을 하여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절차]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사흗날 밤 11시부터 모시는데, 일주일에서 열흘 전에 제관(祭官)을 선출한다. 제관은 화주 2명, 축관 1명, 헌관 1명, 아헌 1명, 종헌 1명 등 모두 6명을 선출하는데, 화주 1명은 별신제와 윗당산의 제물(祭物)을, 다른 1명은 아랫당산의 제물을 준비한다. 화주는 깨끗한 사람 중 나이 많은 노부부 또는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를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에 맞추어 선정한다. 화주는 금기에 따라 소변을 보면 찬물로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당산제를 잘 모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자원하기도 하였다. 제의 음식 준비를 위하여 깨끗한 냇가에 막을 지어 화주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제수를 준비한다. 제관을 선출한 이후 제일(祭日) 3~4일 전에 당산 주변과 막 앞 등에 생죽을 꽂아 금줄을 치며 화주 외의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의 제비(祭費)는 명자전[마을 자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1인당 1전씩 거두는 것], 지붕머리돈[마을에서 집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명자전을 써야 하였으며, 그에 따라 지불해야 한 일정한 이자]과 마을답의 세를 받아 충당하였다. 제비가 부족할 경우에는 당산제 때 쓰는 소를 잡고 남은 고기를 각 가정에 나누어 주고 그 양에 따라 거출하기도 하였다. 당산제 때 사용되는 소는 화순 이서장에서 사 오고 나머지 장은 양동시장이나 광주공원 밑 시장 등을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부터는 사정이 어려워 소 대신 돼지머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물(祭物) 구입은 화주와 제관이 함께 하는데 제기(祭器)는 매년 새것으로 준비하며, 마른 고기·김·삼실과 각종 나물 등을 구입한다.

제일(祭日)인 정월 열나흗날 아침이 되면 각 가정과 마을 골목을 깨끗이 청소하고, 점심 이후 부정이 없는 남자들은 냇가에 간단한 막을 지어 제물 장만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웃막에서는 별신제 음식을, 아랫막에서는 당산제 음식을 준비할 수 있도록 2개의 막을 마련한다. 초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 깨끗이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는다. 굿꾼들은 동청 앞에 모여서 굿을 치고 있다가 밤 11시 무렵이 되면 나발을 부는 사람은 제관들과 먼저 별신제단으로 향한다. 별신제는 산신제나 천용제의 성격으로 무등산 산신에 대한 제이다. 별신제의 진설은 소머리 일부와 나물 등으로 간단히 준비한다. 진설과 헌작을 한 후 나발을 불어 알리면 동청에 있는 굿꾼들은 나발에 맞추어 세 번을 불고 굿을 그친다. 이때 독축을 한다. 독축이 끝나면 나발을 불고 다시 굿을 친다. 마을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별신에게 축원하며 소지를 한 후, 제물을 백지에 싸서 흙무덤 꼭대기에 파묻어 헌식을 한다. 이후 제관과 굿꾼들은 윗당산과 아랫당산에 가서 같은 순서로 제를 지내는데, 아랫당산은 굿을 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윗당산에는 소머리의 윗턱을 아랫당산에는 아랫턱을 쓴다. 아랫당산까지 제가 끝나면 액쫓기를 행한다. 긴 대나무 끝에 베쪽을 달고 생미역을 동이에 담아 뿌리면서 잡신을 쫓아내는 의식이다. 깃대와 동이를 든 사람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굿꾼들이 굿을 치면서 마을 아래쪽으로 쫓아 내려온다. 삼우날 오후에 굿꾼들이 당산에 나와 굿을 치면서 윗당산과 아랫당산을 세 번씩 돌고 둥그렇게 서서 두 번 절을 하고 제를 모두 마친다.

[부대 행사]

삼우날 오후 제를 모두 마치고, 정월 17일부터는 마당밟이를 하는데 보통 5일 정도 하였다. 이때 각 가정에서 내놓는 돈이나, 곡식 등을 마을 자본으로 하고, 음식과 술을 대접 받는다. 마당밟이가 끝나면 결산을 보는데,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다른 마을에 비하여 마당밟이 기간이 짧은 것은 마을이 부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용연마을의 굿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초대받아 나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황]

용연동 용연마을 당산제는 1986년까지 모시다가 상쇠 박현채가 작고한 뒤 마을 사람들이 점차 도심지로 이동하고 굿을 칠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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