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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289
한자 平生儀禮
영어공식명칭 Lifetime Ritual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서희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예로부터 주민들이 일생에 걸쳐 중요한 단계마다 거행해 왔던 의례.

[개설]

평생의례는 인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각종 통과의례이다. 인간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의례를 행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광주광역시에서 행해지는 평생의례에는 아이의 출산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산육의례(産育儀禮)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행하는 관례(冠禮), 일정한 연령에 이른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기 위해 행하는 혼례(婚禮), 죽음에 이르렀을 때 행해지는 상장례(喪葬禮)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례의 성격상 광주광역시의 평생의례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생의례의 모습도 과거 전통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고, 현대사회에서는 출산과 혼례 그리고 상장례 등의 의례 대부분이 전문적인 상업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산육의례]

인간의 출생과 관련한 의례인 산육의례는 산전 의례(産前儀禮)와 산후 의례(産後儀禮)로 나눌 수 있다. 광주 지역에서 행해진 산전 의례에는 아기를 갖기 위해 또는 아들을 낳기 위해 명산에 가서 빌거나 당골을 집으로 불러들여 지앙맞이 굿을 하는 등의 기자의례(祈子儀禮), 임신을 알려주고 태아의 성별 등을 암시해 주는 태몽, 그리고 임신 중 오리고기나 개고기 등을 먹지 않고 초상집에 가지 않는 등의 금기가 있다.

출산과 함께 산후 의례가 행해지는데, 출산의 임박에서부터 출산 당일, 그리고 아이의 첫돌까지의 기간에 행해지는 의례이다.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시어머니와 임부(妊婦)는 출산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는데, 태어날 아기를 위한 옷과 베개, 기저귀, 이불 등을 마련한다. 옷은 홑겹으로 마고자처럼 만들며, 깃이 없고 소매는 길게 하여 아기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지 못하게 하였다. 옷고름은 무명실을 몇 겹으로 꽈서 길게 만들어 다는데, 오른쪽 옷고름은 짧게 왼쪽 옷고름은 길게 하여 왼쪽 옷고름으로 몸통을 한 바퀴 돌려 오른쪽 옷고름에 연결시킨다.

출산은 주로 임부가 평소 기거하던 방에서 하였다. 과거에는 시어머니나 마을에서 아이를 많이 받아본 여성이 임부의 순산을 도왔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병원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출산한다. 산실(産室)의 윗목에는 삼신상을 차려놓는데, 방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상을 놓고 정화수 한 그릇과 미역을 놓는다. 시어머니나 출산을 돕는 산파가 미리 준비해 둔 실과 가위로 아이의 탯줄을 묶고 자르는데, 이때 탯줄에 고인 피를 아기 쪽으로 훑어 넣고 아기의 배꼽에서 무릎까지의 길이로 자른다. 출산 후 산모가 먹는 음식을 첫국밥이라고 하는데, 삼신상에 놓았던 쌀과 미역으로 밥과 국을 끓여 먹는다.

옛사람들은 산모가 출산한 집에 외부인의 출입이 잦으면 산모의 젖이 적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산모의 해산을 알려 '궂은 것'의 출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문 위에 금줄을 쳤다. 금줄은 왼새끼로 꼬아 남아를 출산하면 숯, 고추·백지를 오려 끼우고, 여아를 출산하면 고추만 빼고 꽂는다. 금줄은 세이레 또는 일곱이레 동안 쳤다가 마지막 날 저녁에 걷어냈다.

출산 후 3일이 되는 날을 '삼일'이라고 하여 삼신상을 차려놓고 시어머니가 아기와 산모를 위해 비손한다. 만약 산모의 젖이 부족하면 일종의 주술 행위인 '젖타기'를 한다. 새벽에 샘에 가서 두 개의 병에 샘물을 담아 끈으로 묶어 목에 걸고 "우리 애기 젖 많이 태와 주소."라고 빌고 집에 돌아온 뒤 삼신상에 그 물을 놓고 "우리 애기 젖 많이 태왔습니다." 하고 빌면 젖이 돌아온다. 이렇게 해도 젖이 돌지 않으면 밥물을 받아 먹이거나 생쌀을 입으로 씹어서 그것을 끓여 먹인다.

아이의 이름은 주로 집안의 제일 웃어른이 서열이나 항렬을 따져 짓고, 아이가 태어난 뒤 이렛날마다 삼신상을 차려놓고 비손하는데 이렇게 세이레나 일곱이레를 지내면서 아이의 무병장수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되면 돌을 쇤다. 돌날이 되면 윗목에 지앙상과 떡시루를 해놓고 손비빔을 하며, 친지들과 이웃들을 초대하여 돌잔치를 한다. 이때 상 위에 책, 연필, 쌀, 돈 등을 놓고 아이가 무엇을 집는지를 보고 아이의 장래를 예측하기도 하는데 이를 돌잡이라고 한다.

[관례]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례를 관례라고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따라 관례를 치렀다. 양반가에서 남자는 15세 내지 20세가 되면 모두 관례를 한다. 광주 지역에서는 혼례를 하루나 이틀 앞두고 관례를 하였다. 이를 '상투틀기' 또는 '상투올림'이라고 한다.

양반들과 달리 농가에서는 결혼할 때 상투를 틀고 머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였으며, 농부들 사이에서는 성인 농군으로 인정해주는 의례로서 진서례를 행하였다. 진서란 성인 농군을 이르는 말로 아이가 17세쯤 되면 노동력이 성인 농군들과 대등해지는데, 그 능력을 평가하려고 '들돌'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돌을 일정한 높이까지 들어올리면 성인 농군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때부터는 다른 농군들과 동등하게 두레나 품앗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여자들의 관례로 계례(笄禮)가 있다. 계례란 소녀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머리를 틀어서 비녀를 꽂아 주는 의례로, 광주 지역에서는 혼례 당일에 계례를 하였다. 혼례식 당일 아침이 되면 아이의 댕기머리를 풀어서 낭자를 틀고 비녀를 꼽아 주었다. 머리 양 옆으로 '귀영머리[귀밑머리]'를 땋아서 머리꾸밈을 하였는데, 이 귀영머리는 첫날밤 신랑이 풀어 준다.

[혼례]

혼례란 성인 남녀가 결합하는 의례로, 광주 지역뿐 아니라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혼례를 치러야만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하였다. 광주 지역에서 전통 혼례 절차는 혼인 전에 이루어지는 과정인 의혼(議婚)과 사성(四星) 보내기, 혼인식인 대례(大禮)와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간 뒤에 행해지는 후례(後禮) 등으로 이루어진다.

의혼과 사성 보내기

의혼이란 혼담을 진행시키고 혼사를 결정한 뒤 양가가 여러 가지 문서를 교환하여 혼인을 진행하는 과정을 말한다. 옛날에는 의혼 시 양가 부모끼리 결정하거나, 마을 사람이나 친척의 중매를 통해 결정하기도 하였다. 의혼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혼인이 결정되면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사성을 보낸다.

사성이란 신랑의 사주를 적은 종이로 사주단자(四柱單子)라고도 한다. 사성을 보내는 것은 신랑의 부모가 정식으로 신부의 부모에게 혼인을 청하는 의식으로, 신부 쪽에서는 사성을 받으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혼인을 취소할 수 없다. 이후 신부 측에서 혼인 날짜를 잡고 혼수를 준비한다.

대례

대례는 혼례의 중간 과정에 해당한다. 혼례식 날 아침이 되면 신랑은 신부 집으로 가는데 이를 초행(初行)이라고 한다. 광주 지역에서는 이것을 '장개질' 또는 '장가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고 선영에 장가 소식을 고하고 출발한다. 초행길은 신랑-상객-중방(中房)-하인의 순서로 간다. 신랑이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주점에 든다. 주점이란 신랑이 대례청에 들기 전에 대기하는 곳으로, 신랑과 상객이 주점에서 쉬는 동안 중방이 함을 지고 대례청으로 간다. 함은 신부 쪽 하인 또는 당골에 의해 대례상 위로 넘겨져 신부의 어머니나 마을 부인이 치마로 받는다.

함 안에는 예물과 혼서(婚書), 사모관대, 원삼과 족두리, 고추와 메주, 미영씨[목화씨], 미역 등을 넣는다. 함을 건넨 중방이 주점에 돌아오면 전안시(奠雁時)에 맞추어 신랑이 대례청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신랑은 가마에서 내려 대문 앞에 놓인 노적가리를 넘어서 대례청으로 들어선다. 대례청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대례상을 차리는데, 상 뒤에는 병풍을 치고 위에는 차일을 친다.

대례상은 절구통 위에 '안반(案盤)'을 올려놓은 것으로 양쪽에 대나무와 소나무를 꽂고, 상 위에는 살아있는 암탉·수탉과 무로 깎아 만든 숭어에 대추를 물려놓으며, 미영씨와 고추, 팥, 콩 등을 한지에 싸서 묶어 놓는다. 예식은 홀기(笏記)에 따라 진행되며, 식이 끝나면 신부가 먼저 큰방으로 들어가고 신랑이 따라 들어간다.

동상례(東床禮)와 첫날밤

대례를 치른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자고 다음날 신랑 집으로 간다. 혼례를 치른 저녁에 신부의 일가친척이 모여 신랑을 데리고 노는데 이를 '동상례'라고 하고, 신랑은 술과 음식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이때 일반적으로 신부의 일가친척이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마른 명태 등으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거나 문자를 주고받거나 하며 논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신랑은 신부 쪽 일가친척의 얼굴을 익힌다.

동상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가 신방에 들어가 첫날밤을 지낸다. 신방은 안방에 마련하며, 신랑이 먼저 들어가 있으면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를 차려입고 신방에 들어온다. 이후 주안상이 들어오면 신랑과 신부는 간단히 요기를 한 다음 잠자리에 든다.

신행(新行)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처음으로 시가(媤家)에 가는 것을 신행이라고 한다. 신행은 혼례식 다음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3일 만에 하는 경우도 있고, 일진을 보아 살이 낀 날은 피하기도 한다. 신부 집이 부유해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1년 만에 신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광주 지역에서는 '신부 묵힌다.'고 하였으며, 이 경우에는 신행 날짜를 따로 받아 이바지를 장만하여 가지고 간다.

신행은 '신부-신랑-상객-짐꾼'의 순서로 간다. 신행길에는 큰 물이나 큰 나무 등을 지날 때 던지는 세미쌀을 준비해 가는데, 세미쌀은 한지에 쌀을 한 줌씩 싸서 실로 묶어서 만든다. 만약 신행길에 상여를 만나면 신부만 내려서 재배한다.

시가에 도착한 가마는 큰방 문 앞에 내려놓는데, 이때 신랑이 신부의 가마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신부는 당골이나 인접의 인도에 따라 큰방으로 든다. 상객이 돌아간 뒤에 신부는 '폐백(幣帛)'을 드리는데, 시가의 일가친척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식으로 '구고례(舅姑禮)'라고도 한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신부가 마당에서 마루에 앉은 시부모를 향해 절을 올린다. 이때 신부는 친정에서 마련해 간 폐백감을 폐백상에 차려놓고 절을 하며, 먼저 시부모께 큰절을 올린 다음 조부모부터 순서대로 절을 하고, 육촌 이상은 한꺼번에 맞절을 한다.

재행(再行)과 근친(覲親)

재행은 혼례 후 신부가 처음으로 친정에 가는 것으로, 신행 후 3일 만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바지를 해 가는데 흰떡과 인절미, 술과 고기 등을 준비해 간다. 혼인 후 1년이 되면 근친을 간다. 신행 온 후 1년 농사를 지은 다음 그것으로 이바지를 해서 가져가는데, 신랑은 며칠 머물다 혼자 돌아오고, 신부는 한 달 정도 머물다 친정아버지와 함께 이바지를 해 시가로 돌아온다.

[상장례]

사람이 죽으면 맞이하는 의례로, 평생의례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엄숙하게 치러진다. 오늘날 광주광역시의 상장례는 대부분 전문 장례식장에서 치러진다. 탈상도 대개 삼일 탈상이나 사십구일 탈상으로 변하고 있어 과거와 같은 엄격한 삼년 탈상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는 과거 광주 지역에서 엄격하게 행해졌던 상장례의 모습을 간략히 제시한다.

초종(初終)

고인이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보는 임종부터 초혼(招魂)과 수시(收屍) 그리고 사자상(使者床)과 부고(訃告)를 내는 과정까지가 초종이다. 광주 지역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려면 예조가 나타난다고 하여, 혼불이 나가는 것이 보이면 3~4일 안에 그 집에 초상이 날 것이라고 믿었다. 대체로 남자의 혼불은 길고 여자의 혼불은 둥그렇다고 한다.

고인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면, 곧바로 시신의 손발이 흩어지지 않도록 손발을 괴서 펴준다. 또한, 부정한 것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초혼을 하는데, 고인의 속적삼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쪽으로 세 번 돌린 뒤 "해동조선 ○○ 아무개 복복복"이라고 세 번 외치고 지붕으로 던진다.

초혼이 끝나면 수시(收屍)를 하는데, 수시란 시체를 바로 잡아 칠성판에 눕히는 것을 말한다. 칠성판은 통대나 대를 쪼개 만들며, 칠성판 위에 시신을 곧게 눕히고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한 뒤 홑이불을 씌우고 앞을 병풍으로 가린다.

그 뒤 대문 밖이나 안쪽에 사자상을 차려놓는데, 바닥에 짚을 깔고 세 개의 상 위에 밥을 각각 한 그릇씩 놓거나 상 하나에 밥 세 그릇을 차려놓기도 한다. 저승길 여비라고 하여 돈이나 담배와 술 등을 함께 올려놓기도 한다. 바닥에는 바구니에 담은 밥과 짚신 세 켤레를 놓는다. 상사(喪事)는 친척과 이웃에게 알리는데, 이것을 부고라고 하며 부고를 받은 사람은 곧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부고장을 헛간이나 화장실 처마에 꽂아놓는다.

습렴(襲斂)과 성복제(成服祭)

초종의 절차가 끝나면 시신을 목욕시켜 입관(入棺)을 하는데 이를 습렴(襲斂)이라고 한다. 시신을 목욕시키는 것이 습(襲)이고, 시신을 묶는 것을 소렴(小斂), 입관하는 것을 대렴(大斂)이라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상례를 치르는 요즘의 습렴은 대개 망자가 사망하고 이튿날에 하지만, 과거에는 습은 당일에 하고, 소렴과 대렴은 이튿날과 사흘째 되는 날 하였다.

염을 한 뒤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망자의 입에 세 번 넣는 반함(飯含)을 한다. 이것은 저승길의 양식이라고도 하고, 배가 고파 자손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돈을 망자의 겨드랑이 밑 옷 속에 넣어두기도 한다. 다음으로 수의(壽衣)를 입힌다. 수의는 주로 명주베로 만들며 남자는 관복을, 여자는 원삼 족두리의 혼례복을 겉옷으로 입힌다.

습이 끝나면 소렴을 하는데, 망자를 마포로 감싼 뒤 삼노끈으로 몸 전체를 세 매듭이나 다섯 또는 일곱 매듭으로 묶는다. 그리고 네모난 천이나 주머니를 만들어 얼굴을 가린 뒤 입관한다. 입관하는 것을 대렴이라고 하며, 관의 바닥에는 지금(地衿)이라 하여 삼베로 만든 홑이불을 깔고 나서 남은 자락으로 시신을 덮는다.

입관이 끝나면 관 뚜껑인 천개(天蓋)를 덮은 뒤 널 위에 남자의 경우에는 '모관모공지구(某貫某公之柩)', 여자의 경우에는 '모봉모씨지구(某封某氏之柩)'라고 쓰거나, 집안 풍습에 따라서 관의 상하(上下)만 써서 표시하기도 한다. 그 뒤에 종이나 짚을 왼새끼로 꽈서 만든 줄로 관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다.

입관 절차가 모두 끝나면 윗목에 관을 모셔놓고 앞에는 병풍을 친다. 병풍에는 명정(銘旌)을 걸고 앞에 혼백상(魂魄床)을 차린다. 혼백상 위에는 항상 향을 사르고 영정을 놓는다.

입관 후 상주를 비롯하여 상사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상복을 입는다. 상복을 입고 혼백상 앞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성복제(成服祭)라고 하며, 성복제 후에 비로소 조문객을 맞이할 수 있다. 출상 전날 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빈 상여를 메고 상여를 놀리는데, 이것은 상여소리를 맞추어 보고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장례(葬禮)

광주광역시에서 장례는 삼일장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매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먼저 방에서 관을 내와 상여 앞에 놓고 집안에서의 마지막 제사를 지내는 발인제(發靷祭),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을과 하직한다는 뜻의 거리제[路祭]를 지내고 난 뒤 장지에 도착하면 비로소 매장을 한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지관이 정해준 시각에 맞추어 하관(下棺)을 하는데, 이때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다. 관을 광중(壙中)에 내리고 나면 관 주위에 보토(補土)를 하고 명정을 깐 뒤에 동천개를 덮는다. 이때 상주는 흙을 삽에 떠서 세 번에 나누어 상중하로 관 위에 뿌린다. 이어 일꾼들이 매장을 하는데 땅을 다지면서 다구질소리를 하기도 한다. 흙이 평지의 높이가 되면 평토제(平土祭)를 모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봉분을 완성한 뒤에 하기도 한다. 평토제를 모시면 산역(山役)이 끝난다. 이후 상주는 영정을 모시고 왔던 길을 되밟아서 집으로 온다. 이때는 누구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며, 집에 돌아오면 상청에 영정을 모신다. 상청은 빈소 또는 상방이라고 하는데 탈상 때까지 둔다.

반혼제(返魂祭), 우제(虞祭), 졸곡제(卒哭祭), 소상(小喪), 대상(大喪), 담제(禫祭)

장례식이 끝나면 반혼제와 우제, 졸곡제, 소상과 대상, 담제를 지내는데, 이렇게 해야 3년간의 모든 상례 과정이 끝난다. 반혼제는 시신을 묻고 집에 혼백만 모셔와 지내는 첫 제사로, 이를 따로 하지 않고 초우제(初虞祭) 때 함께 하기도 한다. 우제는 시신은 보내고 영혼만 맞아 위안한다는 의미의 제사로 세 차례에 걸쳐 지낸다. 졸곡제는 초상 후 3개월이 지난 날 올리며, 수시로 하던 곡을 그치는 제사이다. 초상이 난 뒤 일 년이 지나면 소상을 지내는데, 이때는 친지와 사람들의 조문을 받는다. 소상 후 일 년이 지나면 대상을 지낸다. 대개 탈상(脫喪) 또는 탈복(脫服)이라고 부르며, 대상을 치르고 나면 영좌(靈座)를 치우고 상방(喪房)을 없앤다. 상방을 만들었던 광목과 나무들을 모아 태우고 남은 망자의 옷가지도 이때 모두 태운다. 담제는 대상을 지낸 2개월 뒤에 올리는 제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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