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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723
한자 舞踊
영어공식명칭 Danc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승한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인간의 미적 정서를 움직임으로으로 표현하는 예술 행위.

[개설]

1900년대 초 무용은 우리나라의 전통무용부터 유럽, 미국의 새로운 형식의 춤, 발레, 사교춤 등을 통틀어 광범위하게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무용은 학교에서 율동체조로 교육되었을 뿐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1년 5월 31일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학생음악단이 서양의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면서 소개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광주에 최초로 발레가 정식으로 공연되고 소개된 것은 1926년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공연하면서였다. 이후 이시이 바쿠에게 지도를 받은 최승희(崔承喜)[1911~1969]가 1936년 광주극장에서 초립동과 장고춤을 선보였고, 1940년 광주극장에서 창작 무용 공연을 하면서 광주에서 최초로 현대 무용을 공연해 광주 사람들에게 현대 무용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 현대 무용가인 조택원(趙澤元)[1907~1976]도 광주극장에서 무용을 공연하였는데, 우리나라 신무용의 효시가 된 「가사호접」을 왈츠곡에 맞추어 직접 추었고 무용시 「만종」을 안무하여 본인이 직접 춤을 추어 남성 무용수 현대 무용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들의 공연은 단순히 공연한 것에 그쳐 현대 무용이 광주에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전통 무용은 권번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광주권번은 1920년대 초 기생조합 설립이 시초였는데, 최서현이 당시 부호였던 정덕범에게 건물을 지원받아 남동에 설립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최서국이 북문에 기생조합을 설립하였다. 2년 뒤 남동과 북문 밖 권번은 통합되어 광주예기조합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941년 12월 광주예기조합광주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생들에게 검무, 승무, 바라춤, 살풀이, 굿거리, 부채춤, 장구춤을 지도하였다. 하지만 1944년 3월 일제가 전국의 권번을 폐쇄하면서 사라졌는데, 8.15 광복 이후 다시 부활하여 6.25전쟁까지 운영되었지만 다시 해체되었다. 이후 지방 유지들의 노력으로 1951년 광주국악원이 개설되고, 1976년 폐쇄된 전남민속예술원의 창립에 이어 광주시립국악원이 개설되면서 명맥을 이어 갔다.

8.15 광복 후 광주 신무용 교육은 학교 무용과 개인 무용연구소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경자는 광주에서 최초로 현대 무용 교육을 한 인물이었다. 이경자는 최승희에게 신무용을 배운 후 1948년 광주여자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일반 학생들에게 무용 수업을 하였고, 이경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전문적으로 신무용을 가르쳤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문적인 무용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무용 교육과 예술 활동을 하는 무용인들이 등장하였다.

광주 무용의 본격적인 발전과 중흥을 살펴보면, 1960년대 광주 현대무용은 1960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가 주최하는 호남예술제에 중·고등부 무용 부문이 신설되고, 5년 뒤 초등부가 신설되자, 광주에 무용연구소나 무용학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60년 무용가 박금자가 계림동에 이원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고, 박은하가 광주우체국 옆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1969년 강화량이 전일빌딩 뒤편에 녹성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 운동 경기 위주의 체육 교육에 중점을 둠에 따라 학교 교육에서 무용 교육은 외면받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무용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학교 무용은 1960년 후반 학원 무용을 지원받아 콩쿠르 무용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무용 교사의 지도 아래 각종 콩쿠르에 참여하여 두각을 보였다.

1970년대 광주 무용은 1971년 전남무용협회가 새롭게 출범하였는데, 같은 해 조선대학교 체육대학에 무용과가 지방대학 최초로 개설되고, 1976년 광주시립무용단이 창설되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면서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63년에 결성되었던 전남무용협회가 1971년에 새롭게 출범하면서 1973년 제1회 교육감기쟁탈 장학생 및 무용 콩쿠르를 신설하였다. 제2회부터 전남도육감기 쟁탈 무용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86년 전라남도와 광주시가 분리되면서 1987년 제1회 광주직할시교육감기 전국 학생 무용 경연대회로 개편되었다. 1973년 송준영은 부산 활동을 청산하고 조선대학교 무용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송준영은 197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조선대학교 무용과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회관에서 「길」, 「해조음」, 「한산도」를 공연하였고, 같은 해 제2회 조선대학교 무용과 발표회로 「위대한 얼」을 공연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는 광주시민회관에서 「귀의」, 「태평무」, 「인연」, 「법열」을 무대에 올렸다. 이와 더불어 한국무용은 학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진옥은 1974년 광주시립국악원에서 호남검무를 지도하였고, 양태옥은 1975년 진도에서 광주로 올라와 국악전통기악전수원이란 개인 강습소를 열어 진도북춤을 지도하였다.

1980~1990년대 광주 무용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양정수는 조선대학교 무용과에 현대 무용 교수로 부임해 미국의 현대 무용과 육완순계 현대 무용을 광주에 최초로 보급하였다. 양정수는 1986년 빛고을현대무용단을 창단해 「우리를 다시 날게 하는 것」, 「꼭두각시의 영상」, 「만나는 순간」,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등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또한, 1988년 조선대학교와의 갈등으로 무용과 교수에서 물러났던 박금자 광주시립무용단장이 조선대학교 무용과에 복직하면서 광주시립무용단에 조선대학교 무용과 출신 학생들이 입단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광주시립무용단은 1988년 10월 부산문예회관에서 「라 바야데르」 공연을 비롯하여 「지젤 2막」, 「장희빈」을 공연하였고, 국립극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돈키호테」를 공연하였고, 국립발레단에 이어 두 번째로 「백조의 호수」 전막을 공연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광주 발레는 1990년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991년 1,800석 대극장인 광주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면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형 공연이 열리게 되었다. 광주문예회관 준공 기념 공연으로 광주시립무용단의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 레닌그라드 국립발레단 공연, 국립키예프발레단 공연, 모나코 왕립발레단 초청 공연 등 국내외 발레가 공연되었다. 활발한 국내외 발레 공연을 바탕으로 1994년 제1회 광주국제발레페스티벌을 개최하였고, 1997년 제2회와 2000년 제3회를 개최하였다.

1986년 전남도립국악단이 창단되고, 1989년 광주시립국극단도 창단되면서 한국 무용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조선대학교 무용과 교수 송준영은 한국 무용 전공생들과 함께 제4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열녀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바다는 바다는 울고 있더라」로 제6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참가해 안무상을 받았다. 1985년 CBS무등 무용대축전에서 「고풀이」를 공연하였고, 1986년 「시나위」, 「문」, 1987년 「쉬어간들 어떠하리」, 「한국환상곡」 작품 등을 공연하였다. 1988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의 비극과 설움을 무용화한 「빛고을 진혼가」를 공연하였고, 1989년 「화관무」, 「부채춤」, 「훈령무」, 「살풀이춤」 등을 공연하였다. 1991년에는 「미리내가시버시」, 1992년 「태초의 춤」, 「나단의 묵시록」 등 대작을 안무하였다. 1993년 광주·전남 지역 명무전에서 「남도살풀이춤」을 추었고, 제74회 전국체전 문화행사에서 「만월」을 공연하였다.

조선대학교 무용과 교수 김미숙은 1985년에 「살풀이춤」, 「화관무」, 「농악무」, 「부채춤」 등을 공연하였고, 1989년에 「승무」, 1990년에 「화관무」, 「살풀이춤」, 「승전무」, 「승무」 등을 공연하였다. 1992년에는 김미숙궁중무용공연에서 「가인전목단」, 「춘앵무」, 「학무」, 「초무」, 「승전무」, 「처용무」, 「포구락」, 「춤의 꽃밭으로」를 선보였다. 1993년 광주·전남 지역 명무전에서 「춘앵무」를 공연하였고, 1996년 호남 지역 무용과 발표회에서 「포구락」을 공연하였다. 1997년 궁중무용 「수연장」, 「보상무」, 「문덕곡」, 「육화대」, 「선유락」 등을 선보였다. 김미숙은 우리 고유 전통이 소외될 수 있던 시기에 궁중 무용을 그대로 접할 수 있도록 많은 연구와 공연 활동을 하였다.

2000년대 이후 광주 무용은 전반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광주시립무용단도 1996년 박금자 단장 이후 박경숙, 이영애, 김유미 단장 체제로 바뀌었고, 한국무용협회 광주광역시지회도 임지형, 정혜경, 김미숙 지회장 체제로 바뀌었다. 광주시립국극단도 조상현, 성창순, 홍성덕, 송순섭, 윤진철, 김영옥, 유영애 순으로 예술감독이 바뀌었다.

광주 공연 예술 활성화를 위하여 공연예술제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2006년 광주국제공연예술제가 개최되었고, 제1회를 성황리에 마치면서 문화관광부와 광주광역시가 각각 3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제2회를 치르는 도중 내부의 불화로 인하여 조직위원회가 개편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8년 아시아공연예술제추진위원회 주최로 아시아 지역 공연예술제가 열렸고, 2010년까지 4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아시아 지역 공연예술제는 2011년 신설된 '페스티벌 오! 광주-브랜드 공연 축제'로 개편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사회 교육과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무용 학원이 78개가 개설되었고, 생활 무용이 활성화되면서 스포츠댄스, 재즈, 벨리댄스 등을 가르치는 무용 학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엄댄스루트[2001], 문현화 M댄스 무용단[2001], 서영무용단[2002], 비상무용단[2005], 그랑무용단[2007], 광주 로얄발레단[2008], 그린발레단[2010] 등 많은 무용단이 창단되었다. 또한, 2010년대를 전후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연장 상주 단체를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무용단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광주광역시 공연장 상주 단체는 2019년 송년 콜라보 공연 '함께, 예술'을 개최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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