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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41
한자 五一八民主化運動
이칭/별칭 5.18,광주의거,광주 민주화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0년 5월 18일연표보기 - 5.18민주화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0년 5월 27일연표보기 - 5.18민주화운동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79년 12월 12일 - 12.12군사반란

[정의]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개설]

1980년대 5월,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유신세력 척결', '비상계엄 철폐' 등을 외치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3선개헌, 유신헌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군사독재와 집권 연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을 고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틈을 타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군사반란을 일으켰으나, 1980년 3~4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신군부 집권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80년 5월 16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주변, 옛 전남도청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점으로 전국 계엄령을 확대 실시하였다.

[경과]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기 시작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를 하였고, 계엄군은 무차별적인 구타와 함께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을 말리려던 시민들까지 폭행하는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나갔다. 시위를 막기 위해 계엄군은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으며, 광주시의 통금을 저녁 7시로 조정하였다.

1980년 5월 19일 새벽 3시 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하였다. 광주 시민의 저항은 거셌고,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과 광주 시민의 대치 상황과 충돌이 반복되었다. 이에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여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5월 20일 오전 8시 경, 광주시 소재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 6시 40분경, 버스·화물차·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금남로에 출현하였다. 계엄군과 경찰은 가스와 최루탄을 이용해 시위대를 저지시키려 하였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노동청과 세무서에 몰려가 계엄군의 진압을 규탄하였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주MBC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21일 오전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던 전화가 끊겼다. 오후 1시경, 광주 시민들의 시위 물결은 더욱더 거세졌고 계엄군은 이를 저지하려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였다. 계엄군은 광주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하였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려는 시민들에게까지 총을 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전라남도 및 광주시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가져오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을 확보하였다. 무기를 확보한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편제되었다. 결국 오후 5시 30분 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였다.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하였다. 오후 7시 경, 시민군들은 도청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하였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경, 계엄군은 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하였다. 교전 시간은 약 1시간 남짓 이루어졌고, 많은 시민군들이 사망하였다.

[결과]

5.18민주화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으로 남았으며, 1987년 6월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의의와 평가]

5.18민주화운동은 '민중항쟁', '광주의거', '광주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고 있는데,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있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1980년대 당시 계엄군에 의해 '광주사태'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시민단체 등은 여전히 '민중항쟁'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러나 1990년대 5.18 관련 법률이 제정되면서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는 무정부 상태였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켰다. 광주 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하였으며, 각 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헌혈에 앞장섰다. 이를 통해 광주 시민들이 보인 저항과 사회 참여, 연대의식은 세계사에 중요한 민주화운동의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1997년 4월 29일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1997년 5월 16일에는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에 새로운 5.18묘역이 완성되었다. 1997년 5월 18일에는 정부 주관 하에 첫 5.18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5.18묘역은 2002년 7월 27일에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되어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2011년 5월 25일,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국가 권력에 저항하였던 광주 시민들의 희생정신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이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 인권, 평화 정신을 전 세계인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광주시사』3(광주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5)
  • 5.18기념재단(http://www.518.org)
  • 국립5.18민주묘지(https://www.mpva.go.kr/518/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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