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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512
한자 親舊
이칭/별칭 노래패 친구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유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87년연표보기 - 친구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친구 해체
최초 설립지 친구 - 광주광역시
성격 문화예술 단체
설립자 정세현

[정의]

1987년 광주광역시에 설립된 민주화 운동 관련 노래패.

[개설]

1985년에 전남대학교 국악과(피리전공)에 입학한 문성인(정세현)은 전남대학교에 노래패 횃소리를 만들어 학내 노래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는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명명되었고 시민들의 항쟁은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자들은 폭도로 몰려 진상규명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문성인은 대학 입학 전에 이미 광주의 문화운동에 참여했던 자로서 학내의 활동만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광주의 문화운동계에서의 요청도 있었다. 결국 문성인은 예명을 정세현으로 정하고 배은경, 류진주와 함께 사회 노래패인 친구를 창단하였다. 후에 김종섭, 이병채, 김영학이 보강되어 창단공연을 마쳤고, 이후에 전영규, 주하주, 박양희, 강숙향, 고애순, 이영운 등이 합류하여 활동을 이어나갔다.

[설립 목적]

팝송이나 디스코 등 외세문화에 만연되어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해가는 우리문화현실을 반성하고 이 땅에 자주적인 민족·민중문화건설을 위해, 민중의 피와 땀이 살아 숨쉬는 진실한 노래들을 만들어 부르고 보급하여 육천만 동포를 한 친구로 만들어가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1987년에 창단된 친구는 노래패로 1988년 광주민중문화협의회, 즉 광문협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되면서 더욱 조직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국으로부터 쇄도하는 초청공연에 참가하면서 친구는 민족적 색채를 지키고 싶은 리더 정세현의 욕구와 초청단체의 대중적 요구 사이에서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정세현은 198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탈퇴하였다. 남은 패원들은 1992년까지 공연과 민족음악강좌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친구는 정기공연을 통해 당시의 이슈를 담은 노래를 창작하고 부름으로써 노래운동을 전개하였다. 제 1회 정기공연 타는 목마름으로, 제 2회 정기공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제 3회 정기공연 통일기 휘날리며, 제 4회 정기공연 전진하는 오월 등이 있다. 또 비합법적이었지만 테이프를 제작하여 전국 사회과학서점을 통해 유통시켰다.

친구의 창단자 정세현이 국악과에 진학하면서 민족음악에 대한 애착이 노래패에 영향을 미쳤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당시의 각성이 더해지면서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작곡한 새로운 노래를 보급하였다. 이후 친구는 전국의 초청공연에 참가하였으며, 그 외에도 민족음악강좌와 노래강습을 통해 노래 창작과 실기를 지도하는 교육사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현황]

1992년 해체된 이후로 친구의 활동은 없으나 노래패원들 다수는 개별적으로 민중음악계와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친구는 노래운동으로 광주 지역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군부의 통치 하에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5.18진상규명운동 등이 전개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고 달려가 노래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다만 음악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로 설립자인 정세현이 탈퇴하는 등의 영향으로 활동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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