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납량사의논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217
한자 納凉私議論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철학 농쟁
관련 인물/단체 한원진|이간|권상하|기정진|전우

[정의]

호락논변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저작인 「납량사의」를 둘러싸고 발생된 성리학적 논쟁.

[개설]

18세기 이후 기호학계의 최대 쟁점이었던 호락논변(湖洛論辨)은 근 2세기에 걸쳐 조선의 학문과 사상을 비롯하여 정치와 사회 등 다방면에서 발생한 논변이다. 조선성리학의 최대 쟁점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에서 제기된 성리학적 주제를 계승하고 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호락논변은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계승자들을 중심으로 기존 학설에 대한 교조적인 계승과 이에 따른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이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다. 기정진의 「납량사의」는 기호학계 내부의 또 다른 학문적 모색과 대립을 일으켰으며, 이 논쟁으로 노사학파는 20세기 초반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를 중심으로 한 간재학파와 함께 근대 성리학의 마지막 논쟁에 해당한다.

[역사적 배경]

18세기 기호 노론 내부에서 제기된 호락논변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기호학계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이었다.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미발심체(未發心體),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 명덕분수(明德分殊) 등의 다양한 성리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조선에서의 성리학 적용에 관한 많은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인물성동이론에서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대한 동질 여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간과 동물 혹은 식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근본적으로 서로의 본성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입장이 나뉘었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는 이간(李柬)이며, 인물성이론의 대표는 한원진(韓元震)이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어,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이후 호락논변은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호락 양론의 계승자에 의한 상대방의 부정과 비난 등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호론과 낙론의 계승자들은 선배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교조적인 계승과 이에 따른 상대방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서로간의 대립과 갈등은 첨예화되었다. 또한 당론화(黨論化)되어 가는 양론의 학문적 입장은 폭넓은 학문 연구를 유도하기보다는 정치적, 지역적, 학맥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기호학계 일각에서는 주요 학자들에 의하여 양론의 갈등과 대립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대안 모색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호론과 낙론의 직접적인 계승자가 아닌 이들 학맥의 사승 관계에서 자유로운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호락논변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식하고, 문제 의식을 공유하였다. 충청도에서는 운창(芸窓) 박성양(朴性陽)[1809~1890]과 박선양의 스승인 중산제(重山齋) 이지수(李趾秀)[1779~1842]가 있다. 그들은 호락논쟁이 정학(正學)과 이단(異端)으로 갈등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의 뜻을 표시하였다.

[경과]

노사 기정진도 일찍부터 호락논쟁에 대하여 학문적 관심을 기울였다. 기정진은 호락의 직접적인 계승자가 아니었기에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측의 논변을 지양하고자 하는 이론적인 모색을 시도하였다. 호론과 낙론이 각각 자파들의 독자적인 학통을 제시하고, 특히 낙론 내부에서 세도 정치하의 정치적 우위를 앞세워 분립적인 낙론 학통을 수립하려는 등 자파의 우월성을 절대화하려는 태도와 달리 이들은 기호학계 내부에서 정주학에 근거한 이론적 모색을 통하여 호락시비를 지양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기정진은 학문 체계가 구체화되던 40대에 이미 호락논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한 「납량사의」[1843년]를 저술하였다. 말년[77세, 1874년])에 이르러 이 저술의 여러 단락을 수정하여, 자신만의 이일분수(理一分殊)론을 확립하였다. 호락논변은 기정진에게 가장 중심이 된 학문 주제였고, 지속적으로 문인과의 교류 속에서 호락논변에 대한 입장을 공유하고 공통된 입장을 형성하여 노사학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정진은 이(理)와 분(分)의 상함성에 주목하여 근원적 동일성의 원리로서 이일지리(理一之理)와 현상계 다양성의 원리로서 분수지리(分殊之理)를 상호 매개하여 보편원리로서의 존재와 당위의 근거인 천명(天命)과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인 현상세계의 성(性)이 유기적 연관성을 가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기정진의 입장은 치열한 갈등과 대립을 보였던 호락 양론에 대하여 당파를 초월,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기정진 사후에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된 목활자본의 『노사집(蘆沙集)』[1882년, 1898년]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기정진의 성리설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완전한 체계의 문집을 발간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져 1901년 목판본 『노사집』의 간행 작업이 영남 서부 지역에서 시작되자, 그 지역의 일부 연재 문인들이 『노사집』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문집 제작 중단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정진의 성리설에 대한 논란이 기호학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기정진의 이기설은 율곡(栗谷)의 이론을 정면에서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중심에는 연재 송병선(宋秉璿)을 위시한 그의 문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논란이 확대되면서 기호학계의 주요 문인들이 가세하였고, 특히 당시 낙론(洛論)의 적통을 계승하고 거대한 문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전우가 연재 문인들의 요청을 받아 논란에 가세하면서 노사 문인과의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우는 「납량사의의목(納凉私議疑目)」[1902년]을 저술하여 자신의 비판적인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후 「납량사의의목 초본육조추록(納凉私議疑目 初本六條追錄)」을 통하여 의문을 또다시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율곡 이기론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은 「외필」에 대하여 비판의 강도를 높였던 것과는 달리 「납량사의」에 대하여는 비교적 완화된 태도를 취하였다.

[결과]

기정진은 「납량사의」를 통하여 인성과 물성의 동론과 이론을 공통적으로 이분상리(理分相離)의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호락논쟁 당사자 및 계승자들이 모두 근원적 동일성과 현상의 차별성의 원리인 이와 분을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으로 ‘이를 분이 없는 존재[無分之物]’라 보고, ‘분을 기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因氣而有]’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낙론에 대한 기정진의 비판은 현상계 다양성의 원인을 기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기정진은 낙론이 주장하는 인성과 물성의 같음[同]을 수용하면서도, 낙론이 다양성의 원인을 기로 상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납량사의」에서의 호락논변에 대한 기정진의 주장을 전우는 이와 분의 체계에 대하여 수용적인 입장을 제시하였다. 낙론이 순수한 도덕 원리로서의 오상(五常)을 중시하고, 인성과 물성의 같음을 주장한 만큼 이를 중심으로 한 기정진의 이일분수 체계를 긍정한 것이다. 하지만 기정진이 낙론에 대하여 편전지성(偏全之性)을 본연이 아니라고 지적하여 비판한 것에 대하여 전우는 대응의 필요성을 느낀다. 전우는 기정진의 문인 기홍연(奇弘衍)에게 "하늘에 원래 이 나뉨이 없으면 인(人)과 물(物)이 어디에서 얻어 이 편전이 있겠는가."라고 비판한다. 전우는 기정진의 언급이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차별적인 현상의 근원을 이로서의 나뉨[分]과 연관짓는 것이고, 이렇게 될 경우 본연에 치우친[偏] 본연과 온전한[全] 본연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순수하고 완전한 이에 편전(偏全)이라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기정진은 편전을 전우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한다. 기정진은 편전이란 현상 세계에서 파악된 것이지만,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에 닿게 된다고 여긴다. 이 이에는 현상으로 분화될 가능태로서의 원리인 분이 내함되어 있어, 이로부터 편전이 드러난다고 본다. 노사학파는 기정진의 입장을 계승하여 전우를 중심으로 한 간재학파를 비판한다. 그들이 파악한 편전이란 인(人)과 물(物)이 받은 성(性)이 혹은 편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성(人性)은 반드시 온전(穩全)하고 물성(物性)은 반드시 치우친[偏] 것은 모두 하늘이 명한 것이라고 하여, 편전을 이와 결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사학파는 편전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양태로 이해하는 반면, 전우는 하나의 양태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병리현상의 유무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납량사의논쟁은 호락 양론의 대립을 지양하고자 하는 입장을 기정진이 제시하면서 발생된 일련의 논변들이다. 이는 당시 호락 양론의 대립적인 갈등의 격화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차별화된 현상을 어떻게 성리학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이다. 이 점에서 이 논쟁은 앞선 시기 호락논변이 보여주었던 논쟁점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학술 논쟁이라는 점과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정치적 사회적 변동 속에서 차별화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여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담겨진 조선 최후의 성리학적 논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