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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학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215
한자 艮齋學派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영수

[정의]

기호학파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말 성리학계의 간재 전우의 학설을 계승한 성리학자 집단.

[개설]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계승하는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표적 인물이다. 간재 전우의 학설은 "도는 지극히 존귀한 실체이고 만물의 주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끌어내려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도기(道器)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문란해진다.[『간재사고(艮齋私稿)』 권28]"라고 하여 이(理)[만물의 이치, 원리, 질서]의 능동적 원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의 절대성을 해친다는 입장이다. 간재는 이무위(理無爲)·심시기(心是氣)를 성리학적 논의의 전제로 삼아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주장하였다.

간재의 학설을 계승한 간재학파는 심본성(心本性)·성체심용(性體心用)·성존심비(性尊心卑) 등을 통하여 인간의 임의적 자의성을 규제하고, 도덕규범의 객관적 표준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규범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들은 간재학파가 당시의 여타 학파들보다 보수적이고 엄격성이 강한 특징을 지니게 만들었다. 이들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에서 화서학파(華西學派)·한주학파(寒洲學派)·노사학파(蘆沙學派) 등과 전방위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런 특징에서 간재학파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은둔자의 길을 택하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에 전념하여 조선은 사라졌지만 성리학적 의리(義理)를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재학파 대표문인]

간재학파 문인 수는 『관선록(觀善錄)』에 기록된 직전 문인들을 살펴보면 경기도 14명, 충청도 266명, 경상도 211명, 강원도 37명, 황해도 2명, 평안도 28명, 함경도 175명, 북간도 22명, 전라도 717명, 제주도 16명 등 전국적으로 1,488명에 달한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1842~1907],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1868~1944],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1877~1960],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1880~1957],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1882~1956],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1891~1874],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1893~1970],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1903~1974],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1877~1956] 등이 있다.

[간재 전우의 학맥]

전우는 21세 때 충청도 아산 신양에서 강학하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와의 사제관계를 통하여 기호학파 낙론(洛論)의 중심 인물이 된다. 당대 기호학파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았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등의 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고산 임헌회에서 간재 전우로 이어지는 이 학맥은 뚜렷한 사승관계로 학맥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임헌회의 도통관에 의거하여 문인들이 작성한 『화도연원록(華島淵源錄)』에 따르면,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농암 김창협→미호 김원행→근재 박윤원→매산 홍직필→고산 임헌회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기하고 있다.

[간재학파의 형성]

간재 전우의 문인들은 당대에 이미 최대 문인 집단을 형성하였으며, 학파의 분포는 전국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임헌회의 수제자로서 기호 낙론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학자로 자리잡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간재 전우의 문하에 문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40대 이후 본격화된 강회를 통해서였다. 임헌회의 학문이 자신에게 전수된 것으로 자임한 전우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을 순회하며 수시로 강회를 열었고, 학문 탐구와 강학을 위하여 수개월 동안 강학처에 머물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다지면서 강회를 진행하였다.

간재학파에서 주목할 점은 간재의 제자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여 스승과 같이 다닌 문인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따라 이동하였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며, 여정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간재학파의 결속력이 다른 여타 학파에 비하여 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간재학파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로는 『관선록(觀善錄)』·『급문(及門)』·『존모록(尊慕錄)』 등이 있다. 『관선록』은 전우 생전에 작성되고 편집된 것을 재정리한 저작으로 전우에게 집지(執贄)[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던 일]하여 사제의 연을 맺고 학문을 전수받은 문인들을 등재하였다. 『급문』은 준계수의(遵戒守義)하면서 입문하기를 원하는 자들, 문하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지만 집지를 행하지 않은 자들, 그리고 집지를 행하였으나 사적(仕籍)으로 돌아간 자들을 망라하여 정리한 저작이다. 『존모록』은 제자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전우를 흠모하여 제자로 들어간 이들을 등재한 자료이다.

각각의 문헌들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수는 『관선록』에 약 1,575명, 『급문』에 약 186명, 『존모록』에 약 577명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또한 강학 활동을 통하여 길러낸 제자들까지 포함한다면 방대한 숫자의 제자들을 길렀다는 것을 추측하여 볼 수 있다.

구한말에 전우는 당대에 유학자가 몸으로 도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지조를 지키거나, 나무를 끌어안고 굶어 죽거나, 숨어살면서 제자를 기르는 것은 훗날 양의 기운을 회복한 터전을 닦는 일이다."[『추담별집(秋潭別集)』 권1]라고 말하면서, 망국의 상황 속에서 숨어살면서 제자를 기른 것은 성리학의 의리(義理)를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하고자 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유선영은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에서 전우가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고, 이이와 송시열을 잇는 적전으로서 조선성리학이 최종적으로 귀결하는 곳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정형규는 "아! 지금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져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힘에 전성(前聖)의 전함을 우뚝 세우고 백 번을 꺾어도 꺾이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스승 한 사람뿐이다. 우리들이 다행히 간옹(艮翁)의 뒤를 좇아 학문이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창수집(蒼樹集)』 권3]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간재학파는 스승인 전우의 길을 따라 유교적 교육과 학맥을 보존 계승하기 위하여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간재학파는 교육에 몰두하였기에 비록 당시의 다른 학파에 비하여 규범주의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이런 면이 다른 학파보다 좀 더 보수적이고 엄격성이 강한 특징을 보이게 된다.

[간재학파의 평가]

19세기 조선 사회는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하는 외부의 위기를 통하여 조선이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사회문제가 극심하게 나타났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조선 사회에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사회 체제를 변혁하여 자강과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것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개화사상이며, 후자는 척사사상이다.

간재 전우는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전통적인 성리학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이자 교육 사업에 힘을 쓴 교육운동가로 평가되는 한편,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가하지 않았기에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는 ‘부패한 유학자(腐儒)’라고 혹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간재학파는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패한 유학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하지 않으며, 은둔하여 교육에 힘썼다는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보이기에 조선의 독립에는 그 명확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학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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