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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09
한자 盧錫中
영어공식명칭 No Seokjung
이칭/별칭 달리는 석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2월 26일연표보기 - 노석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노석중 조선민족대동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노석중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31일 - 노석중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54년 1월 17일연표보기 - 노석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노석중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노석중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285번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 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민족대동단 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노석중(盧錫中)[1875~1954]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달리는 석중(錫仲)'이라고도 불렸다.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대동단]에 가입하여 조선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1919년 노석중은 전협(全協)으로부터 조선민족대동단의 결성 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가입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우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단결과 실력을 양성하자는 취지에서 민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전협과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것이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모아, 주로 각종 인쇄물 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의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집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시켜 망명 정부를 구성하고, 제2의 독립 만세 시위를 추진하려고 계획하였다. 전라남도 일대와 광주에서도 뜻을 모은 인사들이 규합하여 조선민족대동단의 취지에 공감하는 노력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0년 음력 6월 노석중은 노형규(盧衡奎)와 함께 경성부 입정정[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의 신덕영(申德永)을 방문하여 전라남도 부호들을 대상으로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김가진 명의의 포고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임시정부의 혈전 준비는 현재 급속히 진행되어 대동단 의병대 일파가 곧 모종의 활동을 시작할 것이니 여러분은 각자 애국단의 성의를 받들라."는 뜻을 적은 문서를 돌리며 조선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붙잡혔고,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4년 1월 17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7(국가보훈처, 1990)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21. 5. 31.)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 12. 13.)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국가기록원, https://www.archive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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