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노석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08
한자 盧錫正
영어공식명칭 No Seokjeong
이칭/별칭 달리는 기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노석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노석정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31일 - 노석정 광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67년연표보기 - 노석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노석정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노석정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석제면 일곡촌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노석정(盧錫正)[1892~1967)은 전라도 광주목 석제면 일곡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태어났다. '달리는 기준(基俊)[또는 基準]'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전라남도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1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노석정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국내로 잠입하여 전아협(全雅莢), 조병철(曺秉喆), 김정련(金正連), 윤영기(尹永淇), 양인묵(梁仁默), 노형규(盧衡奎), 조병렬(曺秉烈), 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에 있는 신덕영(申德永), 최양옥(崔養玉) 등과 연락해 가며 전라남도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0년 5월 하순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사는 이윤호(李允鎬)의 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제특파원(軍制特派員)인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容), 이재환(李在煥), 정용택(鄭容澤)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시도하고자 자금 모집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의 노영진에게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으로 2000원을 제공하도록 압박하여 1920년 7월 25일 경성에서 100원을 납부받는다.

1920년 음력 8월 25일경 노석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제특파원 호남파견단장 민재식(閔在植) 명의의 「유고(諭告)」라는 제목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며칠 내로 출장원을 파견할 것이니 전 재산의 약간을 제공할 것이며, 본 유고에 따르지 않으면 상당한 처벌을 할 것이며, 관에 밀고하면 국법인 초령(初令)으로 사용을 집행할 것"이라는 뜻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전라남도 광주에서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1955)
  • 『독립유공자공훈록』7(국가보훈처, 1990)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21. 5. 31.)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 12. 13.)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국가기록원, https://www.archives.go.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