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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학원민주화시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32
한자 六二九學院民主化示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8년 6월 29일연표보기 - 6.29학원민주화시위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78년 7월 3일연표보기 - 6.29학원민주화시위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78년 6월 27일 -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78년 6월 28일 - 전남대학교 기독학생회와 운동권 학생 광주YMCA에서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78년 6월 29일 - 전남대학교 학생 '민주학생선언문' 발표 및 중앙도서관 점거 후 단식 농성 돌입
전개 시기/일시 1978년 6월 30일 - 전남대학교 휴교 공고, 전남대학교 학생들 경찰과 투석전 및 시내 진출
전개 시기/일시 1978년 7월 3일 - 조선대학교 시위 실패 및 주동 학생 구속
발생|시작 장소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지도보기
종결 장소 조선대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 309[서석동 375]지도보기

[정의]

1978년 전라남도 광주시 내의 대학생들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연행된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

[역사적 배경]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한 후, 곧바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다. 이에 전남대학교 기독학생회 및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1978년 6월 28일, 전남대학교 기독학생회 학생들은 문리과대학 앞에서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이후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모여 있는 중앙도서관으로 이동,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연행교수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같은 날 밤, 전남대학교 기독학생회와 운동권 학생들은 광주YMCA로 모여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우리의 교육지표'를 낭독, 배포하였다. 그리고 정용화, 노준현을 중심으로 다음날 시위 농성 장소, 선언문 작성자, 배포자, 배포 구역 등을 정하였다.

6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700여 명은 '민주교육선언 교수 즉시 석방, 교수 재임명제 폐지, 상담지도관실 폐지, 학원 사찰 중지, 어용교수 퇴진'의 요구를 담은 '민주학생선언문'을 발표하고, 중앙도서관 2~3층을 점거하여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오후 6시, 페퍼포그를 동원한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학생 100여 명이 연행되면서 농성은 강제적으로 끝났다.

6월 30일, 전남대학교 정문에는 7월 5일까지 휴교한다는 공고가 붙었으며 기동경찰이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막았다. 이에 등교가 막힌 학생들은 9시경 교문에 집결하여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시내로 진출하였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하루종일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나, 경찰의 폭력적 제지로 학생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500여 명의 시위자가 연행되면서 진압되었다.

7월 3일, 조선대학교 학생 김용출, 박형중, 양희승, 유재도 등은 4~5층 강당에서 '조선대학교 민주학생선언문' 및 '조선대학교 당국에 보내는 글'을 낭독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구속되었다.

[결과]

6.29시위로 인해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 가운데 전남대학교 학생 14명과 조선대학교 학생 4명, 광주YMCA 간사와 선언문을 인쇄하였던 사업자 등 총 20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형을 언도받은 노준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속 학생들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학교로부터 제적 처분을 받았다. 이 외에도 시위에 적극 참여한 학생 9명이 무기정학을 받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6.29학원민주화시위민청학련 사건 이후 침체되어 있던 학생운동에 전환점이 되었으며, 광주시 민주화운동 세력의 결집에도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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