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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지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30
한자 喊聲紙事件
이칭/별칭 함성-고발지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2년 12월 9일연표보기 - 함성지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73년 12월 27일연표보기 - 함성지 사건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72년 10월 - 국회 해산 및 비상계엄령 선포
전개 시기/일시 1972년 12월 8일 - 함성지 인쇄 완료
전개 시기/일시 1972년 12월 9일 - 한국민권협의회 이름으로 함성지 배포
전개 시기/일시 1973년 3월 - 고발지 제작 결의
전개 시기/일시 1973년 12월 - 광주고등법원에서 박석무 무죄, 김남주·이강 징역 2년에 집행유예 선고

[정의]

1972년 12월 전라남도 광주시 내의 여러 학교에 배포되었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함성』지로 인해 8명이 구속되었던 사건.

[역사적 배경]

1972년 유신헌법은 사실상 박정희의 1인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 선거 방식을 바꾸는 유신헌법의 통과를 위해 그 해 10월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는 학생 및 전 국민의 자유로운 발언을 봉쇄하는 조치였다. 삼엄한 정국 속에서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의 개교를 하루 앞둔 12월 9일, 전남대학교 학생 김남주와 이강의 주도로 광주시 내의 여러 학교에 『함성』지가 배포되었다.

[경과]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4학년 김남주와 법학과 1학년 이강은 해남중학교 동기로 각각 군 제대 이후 함께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김남주와 이강은 박정희 정부의 폭거에 반대하는 유인물 제작·배포에 합의하고,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인쇄 관련 용품을 광주시 양동시장, 화순군, 담양군 등지를 돌며 구입하였다. 인쇄 작업은 이강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졌으며, 김남주와 이강이 번갈아가며 『함성』지의 내용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후 작업은 이강의 동생 이정과 이황, 조카 이정호가 묵지에 필사를 하고 밤새 번갈아 등사기를 밀어 12월 8일 밤 인쇄를 마무리하였다. 이들은 개학에 맞춰 1972년 12월 9일 밤,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상과대학, 문리과대학, 광주고등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여자고등학교, 광주공업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등에 '한국민권협의회' 이름으로 『함성』지를 배포하였다.

『함성』지의 원문이 남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귀와 눈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세상은 관절이 빠져가고 있는데 우리가 아픈 조국을 고치기 위하여 태어났다. 권력층의 학대와 농민수탈에 시달려 도끼와 죽창으로 봉기했던 1894년의 동학혁명, 사이비 애국자, 중상모리배, 매판자본가, 민족사라는 심판대의 피고석에 앉히노라. 자학과 어두움 속에 허탈을 일삼고 있는 언론, 문화인, 청년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역사적 장전을 소각시키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날조한 반민족, 반민주세력의 무서운 음모가 그칠 사이 없는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하여 4.19정신으로 총궐기하자!"

1973년 3월 초, 김남주와 이강은 『함성』지 배포 이후,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국 대학에 뿌릴 『고발』지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는 전남대학교로 좁혀진 경찰의 수사망에 혼선을 주고, 전국 대학가에 반유신의 신호탄을 올리자는 뜻이었다. 이에 이강과 동생 이황은 『고발』지 500매를 만들어 김남주광주제일고등학교 동창인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2학년 이개석의 자취방으로 '전국대학 학생회 사무실에 고발지를 우송하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배송하였다. 하지만 화물회사에서 『고발』지가 압수되었다.

이강은 1973년 3월 말, 오전 학교 등교길에 붙잡혀 전라남도경찰청 대공 분실 지하실로 연행되었다. 이와 함께 전남대학교 학생 이평의, 김정길, 이정호, 윤영훈, 김용래 등과 고등학교 교사 박석무를 비롯한 총 15명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강과 김남주만 사실상 관련자의 전부였던 『고발』지에 총 15명이 구속되었던 이유는 반유신운동을 철저히 색출하고 반국가 단체 예비음모로 몰아가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였다.

[결과]

1973년 9월 14일, 검찰은 박석무·이강·김남주에게 각각 징역 10년, 이정호·김정길·김용래·이평의·윤영훈에게 각각 징역 5년형을 구형하였다. 이후 9월 25일 선고 공판에서 광주지법 제3형사부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거의 그대로 인정하였다. 다만, 『함성』과 『고발』의 내용만으로 피고인들이 북한 정권 및 북한 노동당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동조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반공법」 적용 부분은 무죄로 선고하였다.

1심이 끝난 이후 피고인 측 변호인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는 항소를 제기하였다. 이에 1973년 12월 항소심 판결에서 광주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박석무의 무죄를 선고하였다. 김남주와 이강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는 정부 전복과 내란 모의의 수괴라는 박석무가 무죄 판결을 받고, 종범으로 지목되었던 학생들이 유죄를 받은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함성』지 사건은 언론의 보도는 없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홍남순 변호사와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이 대거 관여하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수감 중이던 피고인들에게 영치금을 보내주는 등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전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국무총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며, 서울의 많은 학생들은 광주시로 내려와 재판을 방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판장은 반유신·반정부 토론장으로 변할 정도였다. 특히 제대로 배포되지 못했던 『함성』, 『고발』, 『녹두』의 내용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등 반유신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6.27 내용변경 [경과] 내용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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