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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18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노성태

[정의]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광주광역시의 역사.

[개설]

근대(Modern)는 본래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지만, 대개 민족주의·계몽주의·낭만주의 등 18세기 말 유럽에서 등장한 사조와 산업혁명이 영향을 미친 시대를 지칭한다. 한국사에서는 1876년(고옺 13)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이후인 개항기를 '근대사'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지만, 편의상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갑오개혁] 이후를 근대로 지칭한다.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

1895년(고종 32)에 시행된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전라도는 전주부·나주부·남원부 3부로 분할되었다. 이때 광주는 나주부에 속하여 광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고종 33)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어 각 도에 관찰사를 두었다. 이때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리되면서 전라남도란 행정구역이 정해졌고, 전라남도의 관찰부는 광주에 두어지게 되었다. 이후 광주는 전라남도의 수도로 행정의 중심지는 물론 사법·통신·교육·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896년(고종 33) 전남재판소와 나주우체사가 광주로 이전되었고, 1907년에는 금융조합이 전국 최초로 설립되었다. 지방 공립소학교도 광주에 두도록 정해지면서 1896년 광주향교 건물인 사마재(司馬齋)에 광주공립소학교가 들어섰고, 이후 190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읍성 안의 성내면과 성 밖의 공수방·기례방·부동방 등 1면 3방을 합쳐 광주면이라 칭하였다. 1917년에는 면제를 개정하여 지정 면제와 보통 면제로 구분하였는데, 광주는 지정면이 되면서 일본인 면장이 임명되었다. 이후 광주면은 1931년 광주읍으로, 1935년에는 광주군의 지한면·효천면·서방면 3면을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확장하고 광주부라 칭하게 되었다. 이때 광주군의 나머지 지역은 광산으로 개칭되어 광주시와 광산군이 분리되는 단서를 열게 되었다.

[호남의병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내자, 이에 맞서 국권을 지키려는 의병투쟁이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투쟁은 1895년(고종 32)과 1905년, 1907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907년 이후 광주와 전라남도는 그 중심지였다. 1907년 이후 활동하였던 광주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조경환, 김원국·김원범 형제, 오성술, 양진여·양상기 부자, 박현동, 이기손, 최군선, 오상열, 윤영기, 김동수, 강사문, 신덕균, 이원오, 정익중 등 셀 수 없이 많다. 1909년의 경우 광주를 포함한 전라남도는 전국 의병 교전 횟수의 31.5%, 참여 의병 수의 45.5%나 차지할 정도였다.

근대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이 고취됨에 따라 전라남도 광주 지역은 전국적인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는 김복현[김철김강·최병준·최한영 등이 앞장서고,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1929년 11월 3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전라남도 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학생운동[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은 국내외까지 확산되면서 전국 320여 개 학교와 5만 4000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광주 3.1운동광주학생운동 당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실천한 '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은 8.15광복 이후 4.19혁명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광주의 경제개발]

근대에 들어서면서 광주를 중심으로 철도가 놓여졌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었고, 광주~송정 간 선로는 1922년 개통되었다. 광주~담양선은 1922년 운전을 개시하였고, 광주~여수선은 1934년 완공되었다.

일제는 1907~1909년경 시가를 정비하고 도로를 개설한다는 명분으로 광주의 옛 관아 건물이었던 동헌, 광산관(光山館) 등을 철거하고 광주읍성을 허문 뒤 시내 곳곳에 일본식 건물을 건축하였다. 성벽과 누문이 없어진 뒤 동서로 도로를 뚫어 시가 구획을 정비해 나갔는데, 그중에서도 지금의 충장로에 해당되는 혼마치도리[본정통(本町通)]는 일본인 점포가 즐비하고 광주우체국 등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광주의 상업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잠사(蠶絲)의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양잠업이 활기를 띠자, 1926년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全南道是製絲株式會社)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교사리에 설립되었다. 이어 1930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에 종연방직주식회사(鍾淵紡織株式會社) 광주제사공장과 약림제사주식회사(若林製絲株式會社) 광주공장 등이 설립되어 근대적 공업 생산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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