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촌마을 돌벅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98
한자 城村-
이칭/별칭 성촌마을 석장승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유적/민간 신앙 유적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성촌길[운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981년 - 성촌마을 돌벅수, 성촌마을에서 학운초등학교 내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2017년 10월 15일 - 학운초등학교 내 돌벅수, 학운초등학교에서 성촌마을 입구로 이전
현 소재지 성촌마을 돌벅수 - 광주광역시 동구 성촌길[운림동]지도보기
원소재지 성촌마을 돌벅수 - 광주광역시 동구 성촌길[운림동]
성격 민간신앙 유물
크기(높이,둘레) 할아버지 벅수 150㎝[높이]|40㎝[너비]|30㎝[두께]|할머니 벅수 145㎝[높이]|34㎝[너비]|32㎝[두께]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성촌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2기의 돌벅수.

[개설]

성촌마을 돌벅수 2기는 각각 할아버지 벅수와 할머니 벅수로 불린다. 원래 성촌마을 입구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으나 1977년 증심사 가는 마을 앞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방치되었다. 1981년 민속교육자료로 활용하겠다는 학운초등학교의 요청에 의하여 학운초등학교 교내 동쪽 정원으로 옮겨졌다가 2017년 성촌마을 주민들의 청원으로 다시 성촌마을 입구의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형태]

성촌마을 돌벅수 두 석상은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왼쪽 할아버지 벅수는 총 높이 150㎝, 너비 40㎝, 두께 30㎝이고, 오른쪽 할머니 벅수는 총 높이 145㎝, 너비 34㎝, 두께 32㎝이다. 할머니 벅수가 할아버지 벅수에 비해 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 벅수는 얼굴에 수염이 있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손등을 포개어 가슴 앞에서 맞잡고 있으며, 어깨와 몸통, 손 등은 선으로 간략하게 새겨져 있다. 할머지 벅수는 저고리에 치마를 입은 듯하게 보이며, 손은 아래쪽으로 향하게 맞잡고 있는 형태이다.

[의례]

성촌마을 제4당산인 돌벅수를 비롯한 7당산 앞에서 정월에 지내던 당산제는 해방 직후 사라져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다. 해방 이전에 지내던 당산제는 제일과 제관은 정월 초에 마을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대체로 6~7일경에 지내었다고 한다. 제관은 화주 1명, 축관 1명, 헌관 1명, 집사 1명 등 4명을 선정한다. 화주는 한 가정을 선정하는데 어린 아이나 임산부가 없고 아픈 사람이 없는 다복하고 깨끗한 가정을 선정한다. 축관, 헌관 등은 연로한 분 중에서 선정하는데 부정이 없어야 하고 그 날의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에 맞추어 뽑는다. 제비(祭費)는 사람 수대로 거두는데 임산부는 두 사람 몫을 내며 마을 사람들 모두 공을 드리는 일로 여겨 제비 충당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매년 걷어 마련하는 제비로 제기와 제물을 마련하는데, 제기는 매년 새것으로 구입하고 제물은 남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여 마을의 것으로 준비하는데, 주로 돼지, 나물, 과일 등을 준비한다. 제일이 결정되면 마을 입구와 상(喪)을 당하여 3년이 되지 않은 집 등 가정 내 부정이 든 집 주변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제물의 준비는 화주가 하는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건으로 입을 가렸으며 또한 말, 시식, 간, 양념 등을 안 한다. 돼지머리는 생것을 그대로 진설한다. 제의 진설은 할머니 당산에서만 하고 그밖의 당산에서는 진설을 안 하고 굿만 쳤다.

농악은 8시쯤 마을 앞 공터에서 시작하고 9시가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제관들과 함께 당산으로 운반한다. 제가 시작되기 전에 나발을 불어 시작을 알리고, 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끝을 알리는데 이때는 자정을 넘는다. 마당밟이는 보름부터 시작하며 그믐이면 끝내고 마을회의를 열어 동네의 일반사항을 의논한다. 이때 이장 선출 등을 결정한다.

[현황]

성촌마을 돌벅수 2기는 1981년 학운초등학교 교내로 이동되기 전까지는 마을 어귀에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서 있었지만, 2017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동하면서 마을 표지석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나란히 서 있다. 마을에서 지내던 제사는 당산제에 대한 인식 변화와 마을 사람들의 화주 기피 등의 요인으로 해방 직후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옛날에 마을에 들어온 도둑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다 벅수 주변만 맴돌아 새벽에 주민에게 붙잡혔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학질에 걸린 사람이 새벽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벅수에 입을 맞추면 병이 낫는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할아버지 벅수와 같이 장승 몸체에 손이 새겨져 있는 것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여수시 동산동, 제주도 돌하루방 등의 벅수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형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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