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58
한자 忠節祠
영어의미역 Chungjeolsa Confucian Shrine
이칭/별칭 명탄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명탄서원길 43[월송동 23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충절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충절사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충절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에서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성격 서원
양식 맞배지붕의 익공양식
건립시기/일시 1851년(철종 2)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3칸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명탄서원길 43[월송동 239]지도보기
소유자 이창원
관리자 이창원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사송정에 있는 여말선초 학자 이명성이명덕의 학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

[개설]

충절사에 배향된 이명성(李明誠)의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전공판서 충정공 이엽(李曄)의 아들로 목은 이색의 문인이며 정몽주와 교유하였다. 적성감무(積城監務),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성심으로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원도 이천에 은거하였다. 후에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킨 유신으로 인정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고려 유신인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이명덕(李明德)이명성의 동생으로 이명성이 절개를 지키며 은거하자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도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해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춘추관,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세종이 즉위한 후 1433년(세종15)에는 중추원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도 갔다 왔다.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사후에는 세종이 직접 제문을 내렸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44년(세종 26) 9월 12일 기사에 실려 있는 제문의 내용에 따르면 내직과 외직을 역임함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특히 외직에 있을 당시 지방 정사를 잘 다스렸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처럼 그의 행적은 공주의 명현(名賢)임을 인정받아 17세기에 쓰여진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도 충청도 공주목의 대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치]

충절사공주시 월송동 사송정 뒷편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있다. 월송교차로에서 사송정경로당 방면으로 직진하면 경로당 맞은편에 명탄서원이, 그 위에 충절사가 있다.

[변천]

충절사는 1490년(성종 21) 건립되었으며 1585년(선조 18) 서원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이 처음 건립된 곳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지명이 명탄(鳴灘)이었기 때문에 충절사를 명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초기에는 공숙공 이명덕의 부조묘로 건립되었다. 1967년 간행된 『명탄서원지(鳴灘書院誌)』에 의하면 명탄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유허지에서 공주이씨 후손들이 초가집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월사 이정구(李廷龜), 조명정(趙明鼎) 등이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호종하며 공주로 피난 온 것을 기회로 사우 복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200여 년이 지난 1851년(철종 2) 공주, 노성, 청주, 대흥, 목천, 홍주, 은진, 연산, 청양 등에서 정해명(鄭海明) 등 유생 90인의 적극적 발의로 송탄 송정(松亭)[현 위치]으로 옮겨 복설하였다. 서원은 복설과 동시에 이명덕이명성 형제를 제향하며 ‘명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전국적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액을 받은 지 20년 만에 훼철되었다.

이후 1955년 공주향교 유림들이 전국의 향교와 유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이듬해인 1956년 현재의 사우와 삼문을 재건하였다. 1957년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1959년 이명성이명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998년에는 이명성의 18세손인 이종인(李種仁)이 충청남도와 공주시, 공주향교 등 여러 유림과 후손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강당을 중건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양식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되어 있다. 삼문의 전면 우측에는 1985년 세운 묘정비와 ‘명탄서원’ 현판이 게재된 강당, 고직사 등이 있고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이명성, 이명덕 형제의 위패와 영정이 세워져 있다. 충절사의 전면 1열은 툇간이며 정면을 개방했다. 측면 벽은 심벽으로 막고 바닥은 흙바닥으로 마감했으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기단은 위를 둥글게 가공한 원추형을 사용하였고, 전면 3곳에 계단을 설치해 두었으며 각 칸의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각각 4개씩의 소로를 끼워 두었다. 사우 앞에는 정면 3칸의 솟을삼문이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전면에 높은 축대를 쌓고 문 정면 한 곳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현황]

충절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에서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충절사의 뒤편에 이명덕의 묘와 묘비가 있고, 현재도 매년 3월 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충절사는 본관을 공주로 하는 대표적인 공주 지역의 성씨인 공산이씨 가문의 유적이다. 공산이씨들이 주변의 여러 향교에 등재되는 상황이라든지,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공산이씨들은 이 지역에 넓게 퍼진 향촌 생활의 중심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공주에 충절사를 다시 세운 것을 보면 이 시기 다시 공주에서 공산이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